이율곡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이이유적지(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는 사적(史蹟) 525호다. 좀 더 자세히 표기하면 비교적 최근인 2013년 2월 21일에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사적 제525호다. 사적(史蹟)이란 ‘문화재보호법’ 제2조의 규정에 따라 역사적·학술적·관상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가가 법으로 지정한 문화재를 말한다. 모두 국유이고 관리자는 해당 지역의 지자체다.​

파주에는 천연기념물 2건, 보물 1건을 포함하여 17개의 국가문화재가 있는데 그중 사적이 14개로 가장 많다. 사적 중에서는 덕진산성(537호), 이이유적지(525호) 등이 가장 최근에 지정된 편에 든다. 예전의 ‘파주용미리혜음원지’가 ‘파주 혜음원지’로 명칭이 공식 변경된 것도 국가 사적 지정(2011.07.28) 고시에 따라서 이뤄진 일이다.​

이이유적지에서는 해마다 율곡문화제가 열린다. 올해로 33회째인데, 파주를 대표하는 3대 축제 중의 하나답게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풍성하게 열렸다. 다른 축제들과 다른 점은 유가행렬과 백일장.미술제도 열리는데, 올해의 유가행렬은 시가지 행진도 담겨서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이유적지는 보호구역 포함 316,854㎡(약 십만 평)이나 되어 매우 너른 편이다. 크게 대별하면 정문을 지나 잔디광장에 이르고 그 좌우로 자운서원과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중앙의 산쪽 위로는 가족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정문 쪽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배치가 된다.​

이이 유적 배치도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신사임당과 율곡의 동상이 보이고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율곡 기념관이 나온다. 이 동상들은 본래 서울의 사직공원에 있던 것인데, 2015년 이곳으로 이설되었다.

율곡 및 신사임당의 동상과 율곡기념관

​율곡기념관에서 잔디광장을 가로질러 정면에 보이는 건물들이 자운서원이다. 잔디광장은 율곡문화제의 수많은 야외 행사들, 곧 기념식과 식전 행사를 필두로 백일장과 미술제가 시행되고 전시회들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자운서원 배치도

자운서원 배치모형

자운서원은 정문 격인 외삼문이 자운문인데 그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공부방 격인 입지재와 수양재가 나오고 중앙 상단에 강의실 격인 강인당이 있다. 서원의 맨 꼭대기 건물이 추향제를 올리는 사당인 문성사다. 

하지만 이이유적지의 답사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빠뜨리지 말고 꼭 살펴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이이 가족 묘역이다. 서원 오른편 산쪽에 숨어 있듯 해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밖에서도 잘 보이는 그 출입문 격인 여현문(如見門)에 주목하면 그 안쪽이 궁금하게도 된다.

묘소 입구 정문 격인 여현문. 일반인들은 열려 있는 좌우 문으로 드나들고 정문은 제사 때만 연다.

여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오르면 계단들이 나오고 그걸 다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묘지들이 있다. 자세히 보면 중앙과 좌우 측의 세 군데인데, 정중앙에 있는 것들이 율곡 부부, 율곡의 맏형 이선(李璿) 부부, 부모, 그리고 율곡의 장남 이경림(李景臨)의 묘다.

율곡 가족 모역 배치도

그런데 묘의 배치를 보면 이상한 게 눈에 띈다. 바로 아들인 율곡 부부의 묘가 무엄하게도(?) 부모보다 가장 높이 맨 위에 배치돼 있다.

위로부터 율곡 부부, 형 부부, 부모의 묘

그리고 자세히 보면 율곡 부부의 묘 배치도 통상적인 것과는 많이 다르다. 부인의 묘가 율곡보다 더 위로, 즉 율곡 묘의 뒤쪽에 배치돼 있다.

부부의 묘는 대체로 두 가지 형태다. 한 기의 묘에 함께 모시는 합장(合葬)과 남편 옆 왼쪽에 나란히 모시는 부좌(祔左) 중 하나일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율곡 부부의 묘는 합장도 부좌도 아니다. 부인인 곡산 노씨의 묘가 율곡보다 높은 상좌(上座) 형태다.

율곡 부부의 묘. 아래가 율곡이고 위의 묘가 부인 곡산 노씨의 묘

이처럼 흔치 않은 묘 배치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식의 현달/입신양명설이다. 아들인 율곡이 부모 묘보다 위에 배치된 것은 조선시대에 자식이 부모보다 더 높게 현달(顯達. 벼슬/명성/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거나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침)을 했을 때는 그 묘를 더 높이 쓰는 당시 풍습에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에도 일리가 있다. 부친인 이원수는 나이 40을 넘길 때까지도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겨우 50살에 그것도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으로 세곡 운반을 감독하는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오른 뒤 내섬시(內贍寺) 주부(主簿.종6품), 종부시(宗簿寺) 주부(종6품. 음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정6품) 등을 거쳤다. 즉 부친의 직급은 겨우 종6품이었던 데에 반해 자식인 율곡은 당상관 정2품 판서 직을 그것도 여러 차례 거친 고관이었다.

그런 아들 덕으로 부친은 사후에 좌찬성(左贊成. 종1품)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비에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행사헌부감찰(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行司憲府監察)이라 적혀 있는 것이 그것이다. 즉 실제 직위(行)는 사헌부 감찰이었지만 좌찬성으로 추증(贈)했다는 뜻이다. 추증 때는 예의상 아들보다는 한 급 높이는 것이 관례여서 종1품인 좌찬성을 제수했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의 묘갈

율곡의 부인 곡산 노씨의 묘가 상좌인 것에 대해서는 노씨의 정려문과 관련된 설명이 있다. 즉 이이의 신도비에 '노 부인은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신주를 받들고 산소로 돌아와 왜적을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는데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를 세웠다‘라고 돼 있는데 그 정려문 때문에 그리되었다는 설명이다. 정려문(旌閭門)은 충신/효자/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인데, 이처럼 국가에서 하사한 정려문을 받은 이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가마를 타고 가던 이는 그 앞에서 내려서 걸어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한 대우의 연장선에서 남편보다 더 윗자리에 모셔졌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곡산 노씨의 경우에는 말이 되지만, 부친의 장남으로 율곡의 맏형인  이선(李璿. 1524~)과 형수인 선산 곽씨(善山郭氏)의 합장 묘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부모의 묘보다 위에 배치된 것에 대해 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선은 총명한 동생 율곡과는 달리 나이 40에야 겨우 식년시(式年試) 소과에 급제해 생원(生員)이 되었고, 최말단 종9품 벼슬인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열이 무시된 묘 배치는 좌측의 가족 묘역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좋은 예가 5~7번 묘들이다. 이들은 각각 이이의 둘째 부인(⑤), 이이의 장손 부부(⑦), 이이의 5대손 부인(⑥)인데, 서열로 치자면 위로부터 ⑤ →⑦ →⑥의 순서로 배치돼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⑥ →⑤ →⑦로 되어 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뒤죽박죽이다.

이처럼 묘들이 묘소 배치의 원칙을 벗어나 다소 복잡미묘하게 설치된 것은 어쩌면 묘 조성 당시의 묘역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묘역이 제대로 조성된 곳에 우선 안치하고 그 뒤의 묘들은 그 주변 토지 상황 등을 고려하여 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가장 먼저 모신 율곡 부모의 합장 묘는 그 구역에서 가장 넓은 평지로서 경관이 빼어난데 비해, 그 뒤로 사망한 형 부부의 합장 묘는 아주 조금만 성토를 해서 급히 꾸린 듯한 작은 묘다. 그리고 가장 늦게 모셔진 율곡 부부의 묘는 제대로 높이 성토를 해서 아주 크게 조성돼 있다.

그러므로 율곡 부부의 묘가 부모 묘소보다 훨씬 크고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로 추정된다. 즉 부모보다 훨씬 높은 직위를 거쳤을 때는 자식의 묘를 더 높이 쓰는 당시 풍습에도 합당하였고, 묘역 조성 당시의 주변 토지 상황 등도 고려하여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벼슬도 낮았던 맏아들의 묘가 부모의 묘보다 위에 배치된 것이 그러한 추정으로 이끈다.

끝으로, 가족 묘역에 매창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율곡의 누님 이매창을 이르는데 모친인 신사임당을 닮아 시서화에 능했다. 선조 때 부안 기생으로 한시와 시조에 능하여 문집 <매창집(   梅窓集)>을 남긴 매창과는 다른 사람이다. 기생 매창은 성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부안에 그녀의 묘소가 남아 있다. <끝>

[취재] 파주알리미 최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