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산은 암소 등허리 같은 능선이 유순하게 이어지는 착한 산이다. 등산로 입구는 율곡아파트, 법원여중, 금곡리, 귀한농부학교, 동문리 등 여러 곳이지만 자운서원을 품은 명산이니 만큼 관람료 1천원을 아끼지 않고 율곡선생유적지로 들어섰다. 율곡이이가족묘 뒤로 입산했다가 자운서원으로 하산할 계획.

율곡선생유적지

사방산 등산로

신사임당과 율곡선생 동상, 율곡기념관은 건성으로 훑어보고, 여현문(如見門)으로 들어섰다. 見의 훈이 볼 견, 뵈올 현이므로 여현문으로 읽는 게 옳다. 그 안에 율곡이이가족묘가 있다. 등산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곳에서는 꼭 챙겨 봐야 할 게 있었다. 11개의 묘가 등성이 세 곳에 나뉘어 있는데, 가운데 줄에는 율곡의 맏아들, 율곡의 부모 이원수-신사임당, 율곡의 맏형부부, 율곡과 부인 곡산노씨 묘가 차근차근 위로 이어진다.

율곡이이 가족묘

율곡 가족묘 전경

언뜻 스치는 눈길에도 걸리는 게 있었다. 하나는 율곡의 묘가 부모의 묘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자식의 묘가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나 같은 사람들의 (근거 없는) 상식인 것이다. 알아본즉, 그 시절에는 따지지 않고 그때그때 좋은 자리에 매장했을 뿐이란다. 파주문화원 우관제 원장의 설명은 좀 더 따뜻했다. 부모가 자식을 업고 있는 형세란다. 향양리의 성혼선생 묘도 부모보다 위에 놓여 있고, 사계 김장생선생의 묘도 그렇단다. 결코 역장(逆葬)이라고 흉볼 일이 아닌, 좋은 형세란다.


또 하나는 한 울타리 안에 율곡과 곡산노씨의 묘가 ‘합장도 쌍분도 아닌 상하로 연이은 희귀한 형태’로 놓여 있다는 것. 안내판에는 ‘노부인이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신주를 받들고 산소로 돌아와 왜적을 꾸짖다가 살해당했는데, 일이 나라에 알려지니 정려를 세웠다’고 쓰여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더 안타깝다. 노부인이 여종과 함께 남편의 묘를 지키고 있었는데 왜놈이 겁탈하려 하자 두 여자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훗날 난리가 끝나 후손들이 이곳을 둘러보니 이이의 묘 옆에 두 여자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부인 것과 여종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유골을 모아 합장도 쌍분도 아닌 형태로 연이어 묘를 썼단다.

율곡과 곡산노씨 묘

등산로는 곡산노씨 묘 뒤쪽 솔숲에 열려 있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금세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율곡아파트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이정표가 서 있다. 등산로는 험하거나 가파르지는 않아도 알게 모르게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몇 개의 나지막한 언덕을 넘기도 하고, 경주의 왕릉처럼 수굿하게 솟은 봉우리를 우회하기도 한다. 멀지 않은 215m 지점, 볼록한 언덕을 자운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사방산(227m)의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주시 법원읍 북부에 위치한 산이다. 조선시대에 자운산(紫雲山)으로 불리던 산이며, 현재 사방산 남사면에 이율곡 묘와 신사임당 묘가 있고, 이율곡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자운산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자운서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자운산이라는 이름은 서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에는 자운산에 대한 기록이 있는바, 파주읍의 동북방향 20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되어 있다. 조선지도, 팔도군현지도, 청구도 등에도 자운산 기록이 있다. 자운산의 명칭이 사방산으로 변경된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대체로 일제강점기로 추정한다. 자운산 자락에 자운서원이 들어서 있고, 땅이 좋은 곳이어서 일본인이 지명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파평산에서 볼 때 손사방(巽巳方)이기 때문에 사방산(巳方山)이 되었다가 다시 현재의 사방산(四方山)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그러니까 ‘사방산이 곧 자운산’이라는 설명이다. 산의 형세를 둘러봐도 서쪽의 문산읍 동문리, 북쪽의 파평면 마산리, 동쪽의 법원읍 금곡리, 남쪽의 법원리에 둘러싸인 독립된 한 덩어리일 뿐, 굳이 둘로 나눠야 할 까닭이 없다.


그곳을 지나면 비학산 줄기의 붉은 절개지가 건너다보인다. 조림사업을 서두르는 게 어떨까 싶다. 조금 뒤에는 금곡리로 내려가는 세갈래길에 닿는다. 파평산 서봉의 관측소와 중봉의 모형 미사일이 잘 보인다. 등산하는 맛을 보여주리라 작심이라도 한 듯, 비탈길이 벌떡 일어섰다.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등줄기에서 땀이 배는가 싶더니 어느덧 정상에 올라섰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전망은 없었지만, 해발 227m 정상표지는 제대로 서 있다. 위성지도에 나타난 고도에서 소수점 이하 0.4m는 당연하다는 듯 지워놓고는, 시치미를 뚝 뗀다.

사방산에서 바라본 비학산 절개지

금곡리 갈림길

파평산 전경

사방산 정상

그곳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귀한농부학교,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문리다. 동문리로 내려가는 길은 짧은 대신 경사가 극심하다. 원점으로 회귀해야 차를 회수할 수 있으니, 올라왔던 길 되짚어 내려갈 수밖에 없다.

사방산 등산로는 한 번도 그늘진 응달로 들어서는 법이 없다. 밝은 곳만 디딘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성 산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옷차림도 등산복보다는 일상복이 대세였다. 


판에 박은 듯 갔던 길을 되짚다가, 자운서원삼거리에서 괄호 안의 (약수터, 680m) 길로 접어들었다. 마른 낙엽 밟히는 소리가 상쾌했다. 율곡약수터의 물맛은 달고 시원해서 정말 약이 될 듯싶었다. 살균정수기능을 갖춰놓아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장점이었다.

율곡약수

자운서원

율곡선생 신도비

쪽문을 통해 자운서원으로 들어섰다.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현석 박세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에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세 분 중 김장생 선생만 영정이 없었다. 바로 옆의 율곡선생신도비까지 챙겨 보고 유적지 주차장으로 나섰다. 왕복 4km, 2시간이 소요된 유쾌한 겨울 산행이었다.


* 취재 : 파주알리미 강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