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는 정조의 고모인데, 사극 <이산>을 보면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조와 반목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그 둘이서 권력 앞에서 앙앙불락을 넘어 서로의 목숨까지 벼르는 극렬한 대치는 드라마의 흡인력을 높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그 둘은 고모와 조카 사이다. 더구나 화완옹주는 정조에게는 부친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었고, 영조 입장에서는 딸과 손자였다.
그 둘의 혈전은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제거하려던 양자 정후겸의 사사(賜死), 그리고 고모의 유배 및 서인 강등으로 정리되었고, 옹주 직위가 삭탈 된 후로는 ‘정치달의 처(鄭妻)’로 불렸다. 강화도 교동과 파주 등으로 유배되었을 때, 여러 차례 대신들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정조는 듣지 않았다. 정조는 1799년(정조 23) 화완옹주의 죄를 없애고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조는 그 교지에 이렇게 적었다: “[전략] 오늘 용서해 석방하려고 하는 것도 선왕의 뜻을 몸 받아 하는 것이다. [...]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죄명을 없애고 특별히 완전히 용서하여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펴는 방도로 삼겠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을 끝까지 아버지의 친동생으로 품어두고 있었던 듯하다. 친부모를 향한 지극 효도가 부친의 친동생에까지 번진 경우라 할 수 있을지. 또는 할아버지의 딸을 살려두는 것으로 자신을 발탁한 할아버지에 대해 보은을 한 것일 수도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에 모친의 묫자리를 찾고자 영조가 왕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던 파주. 그는 훗날 그의 아들과 며느리, 부인(정빈 이씨)과 딸까지 파주에 묻히게 될 것을 짐작이나 하고 있었을까. 하기야 자신의 묫자리로 수길원 자리까지 점지했던 걸 보면 파주 지역을 영면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자신의 묫자리는 타의에 의해 파주와는 좀 떨어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중 하나인 원릉(元陵)으로 정해졌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9개가 있는 九里 東九陵에 모신 것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긴 후대의 선택이었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이 후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뿐 당사자는 완전히 무력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 직전까지만 유효한 존재다. 그럼에도 영조가 파주를 향해 뿌린 시선들은 지금도 파주의 여러 곳에 남아 우리의 눈길을 끈다.
* 취재 : 파주알리미 최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