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와 영조(英祖)


1392~1910년에 걸쳐 518년간 지속된 조선 왕조에 대해,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게 있다. 근대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단일 민족에 의한 단일 왕조라는 사실(史實)이다. 이름으로야 844년을 기록한 신성로마제국(962~1806)도 있지만 명목상의 국가였다. 중국만 해도 300년 정도 왕조를 유지한 건 송나라뿐이었다. 당(618~907), 송(960~1279), 원(1271~1368), 명(1368~1644), ​청(1636~1912)인데, 각각 289년, 319년, 97년, 276년, 276년에 불과했다.

그런 조선국에서 조선을 가장 많이 닮은 국왕은 누구였을까. 그는 21대 영조다. 최장수 국왕(1694~1776)이자 재위 기간 역시 최장기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1세인데 그는 거의 두 배 가까운 83세(세는나이)까지 살았다. 재위 기간이 25년을 넘기는 왕들도 전부 해봐야 9명뿐인데, 그는 단연 최고 기록인 51년 7개월(1724.8~1776.3) 동안 왕위에 있었다.

영조, 최대의 콤플렉스를 효도로 승화시키다 '소령원'과 '수길원'


영조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화경숙빈 최씨(사극 <동이>의 여주인공)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게 최대의 콤플렉스였다. 그럼에도 생모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장희빈과 맞서 인현왕후를 극진히 보필하고, 끝내 인현왕후의 후원으로 자신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모친의 그러한 은공에 대해 최대한의 효도로 갚았다.


숙빈 최씨는 1718년 48세로 영조가 연잉군일 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버지 숙종이 모친의 장지 등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자, 연잉군이 걷어붙이고 장지 물색에 나선다. 처음에 찾아낸 명당 터에는 이미 묘가 들어서 있어서 연잉군은 그 뒤편의 산봉우리에 올라 8일 동안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빌었다. 파주 마장호수 출렁다리의 바로 맞은편 쪽에 있는 산봉우리가 팔일봉(八日峰)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파주 마장호수 흔들다리와 팔일봉

그렇게 해서 영조가 점지한 곳이 현재의 소령원(昭寧園.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65)이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 마장호수에서 왼쪽으로 2.6km 거리인데 차로는 5분 남짓 걸린다.

마장호수(오늘쪽)에서 소령원(왼쪽)까지의 길

소령원길을 사이에 두고 소령원 맞은편에는 묘원이 하나 더 있다.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친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묘소, 곧 ‘수길원(綏吉園)’(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38)이다. 즉 소령원과 수길원은 시어미와 며느리가 쉬고 있는 곳으로 서로 140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본래 수길원 자리는 영조 자신의 쉼터로 여기고 낙점해 두었던 곳인데, 맏아들이 10살에 죽고 그 어미마저 28세에 비극적으로 희생되자(경종 독살용 약제 실험 대상으로 알려진다) 그녀의 소망, 곧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옆에서 모시겠다는 그녀의 바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소령원(좌)과 수길원(우)은 소령원길을 사이에 두고 140m 떨어져 마주 보고 있다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는 영조의 손자 정조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정조의 친부 사도세자는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으로 영조의 둘째 아들인데, 대역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터여서 당시 상황으로서는 정조가 왕세손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영조가 편법을 쓴 것이 손자를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정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정조는 훗날 양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고마움을 기렸다. 정조는 친부인 사도세자도 장헌세자로 복위 후 장조(莊祖)로 추존했고, 수원 행궁을 대대적으로 확장 보수하여 모친(혜경궁 홍씨)과 친부에게 바치다시피 했다. 친부의 묘도 당시 수원부에 속했던 화성으로 천장하여 현재의 능호는 왕릉급인 융릉(隆陵)이다.

영조의 가계도와 묘의 이름들

파주에는 영조의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천년 고찰 파주 보광사(파주시 광탄면 보광로474번길 87) 내에 있는 어실각(御室閣)과 그 옆의 향나무 한 그루다. 어실각은 모친의 제사 때면 벽제원을 넘어 꼭 소령원에 직접 참례하곤 했던 영조가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願刹)로 삼은 뒤 그곳에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조그만 집이다. 그 옆에 있는 한 그루의 향나무는 영조가 자신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심은 것이라고 한다.

보광사 내의 어실각과 그 옆의 향나무

영조의 자식들, 그리고 파주의 '영릉'과 화완옹주의 묘


파주에는 영조와 관련된 묘가 위의 소령원과 수길원 외에도 또 있다. 바로 파주 삼릉[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중의 하나인 영릉이 그것이다. 10살에 죽어 아비인 영조가 몹시 안타까워했던 맏아들 효장세자와 그 빈이 합장돼 있다. 나중에 효장세자는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세자빈도 공순왕후로 추존되었지만, 추존 왕릉은 정상적인 왕릉에 비하여 약간 규모를 줄이고 간소화하는 편이어서, 영릉 역시 아담한 편이다. 파주의 삼릉은 이 영릉 외에 한명회의 두 딸로서 각각 16세, 18세에 요절한 장순왕후(예종 비.추존)와 공혜왕후(성종 비)의 능인 공릉과 순릉을 함께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효장세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탄생시킨 배경도 되었다. 맏이가 일찍 죽자,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를 매우 엄하게 교육시켰다. 백일도 지나지 않은 어린애를 친모에게서 떼어 내어 왕자교육을 시킬 정도로 어찌나 혹독하게 다뤘는지, 조선실록에 기재돼 있는 내용만으로도 가히 ‘아동 학대’라 할 만하다. 그러한 가혹한 조기 교육이 사도세자로 하여금 스트레스에 희생되도록 했고, 이윽고 정신병 수준의 조울증에 시달리게 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온갖 기행(奇行)은 세자 자신도 지병임을 알고 기를 쓰고 치료 약까지 구해 먹을 정도의 정신병적 조울증 때문이었다.


파주에는 영조의 자식 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그가 가장 총애했던 딸이자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었던 화완옹주의 묘다. 그녀의 남편 정치달과 함께 쉬고 있다. 파주시 향토문화제 제14호다.

화완옹주와 정치달의 묘

화완옹주는 정조의 고모인데, 사극 <이산>을 보면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조와 반목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그 둘이서 권력 앞에서 앙앙불락을 넘어 서로의 목숨까지 벼르는 극렬한 대치는 드라마의 흡인력을 높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그 둘은 고모와 조카 사이다. 더구나 화완옹주는 정조에게는 부친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었고, 영조 입장에서는 딸과 손자였다. ​


그 둘의 혈전은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제거하려던 양자 정후겸의 사사(賜死), 그리고 고모의 유배 및 서인 강등으로 정리되었고, 옹주 직위가 삭탈 된 후로는 ‘정치달의 처(鄭妻)’로 불렸다. 강화도 교동과 파주 등으로 유배되었을 때, 여러 차례 대신들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정조는 듣지 않았다. 정조는 1799년(정조 23) 화완옹주의 죄를 없애고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조는 그 교지에 이렇게 적었다: “[전략] 오늘 용서해 석방하려고 하는 것도 선왕의 뜻을 몸 받아 하는 것이다. [...] 정치달 처(鄭致達妻)의 죄명을 없애고 특별히 완전히 용서하여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펴는 방도로 삼겠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을 끝까지 아버지의 친동생으로 품어두고 있었던 듯하다. 친부모를 향한 지극 효도가 부친의 친동생에까지 번진 경우라 할 수 있을지. 또는 할아버지의 딸을 살려두는 것으로 자신을 발탁한 할아버지에 대해 보은을 한 것일 수도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에 모친의 묫자리를 찾고자 영조가 왕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던 파주. 그는 훗날 그의 아들과 며느리, 부인(정빈 이씨)과 딸까지 파주에 묻히게 될 것을 짐작이나 하고 있었을까. 하기야 자신의 묫자리로 수길원 자리까지 점지했던 걸 보면 파주 지역을 영면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자신의 묫자리는 타의에 의해 파주와는 좀 떨어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중 하나인 원릉(元陵)으로 정해졌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9개가 있는 九里 東九陵에 모신 것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긴 후대의 선택이었다. ​


인간은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이 후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뿐 당사자는 완전히 무력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 직전까지만 유효한 존재다. 그럼에도 영조가 파주를 향해 뿌린 시선들은 지금도 파주의 여러 곳에 남아 우리의 눈길을 끈다.


* 취재 : 파주알리미 최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