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산 등산로

비학산 등산로

비학산 능선은 수려하다. 초리골을 양 날개 사이에 품은 채 빗겨 앉았던 학이 머리를 왼쪽으로 치켜들고 비상하려는 듯, 사뭇 역동적이다. 비학산 연봉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자웅산(수산, 264m)부터 올라야 한다. 초리골 앞을 지나는 367번도로 앞 법원새마을2교를 건너 직진하면 된다. 1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는 쉬운 산이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능선의 아름다움은 땀 흘린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자웅산의 원래 이름은 수산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자웅산이 파주읍치의 동쪽에 있으며 도로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방향으로 자리하여 남쪽에 있는 산이 웅산(雄山, 수산)이고 북쪽에 있는 산이 자산(雌山, 암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산과 비학산 오른쪽 꼬리에 놓인 암산을 합쳐야만 자웅산이 완성된다.

자웅산 암산과 수산의 모양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웅산 암산과 수산의 모양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웅산에서 바라본 비학산

자웅산에서 바라본 비학산

지명유래에 따르면 “초리(礁栮)동, 초리골의 바위에는 석이버섯이 많이 달려 ‘초이골’로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초리골 100여 가구 200여 주민들은 청정한 전원마을 지키기에 유달리 힘을 쏟아, 공장 설립을 막는 대신 관광자원 발굴에 나서고 있다. 지난겨울에는 ‘눈 내리는 초리골’ 축제를 열어 관광객을 불러 모았는데, 올겨울 축제준비에도 분주하다. 덕분에 마을을 에워싼 학의 두 날개를 돌아오는 순환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음식점과 카페의 주차장은 무료로 활짝 열려 있다.

초리골길 초입 왼쪽의 승잠원(한정식) 등산로로 들어서서 20여 분쯤은 고생하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그 다음 1km쯤 가다 보면 매바위(215m) 이정표와 만난다. 주능선을 비킨 왼쪽 곁길로 0.1km쯤 떨어진 언덕에 매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당장이라도 덮칠 듯 어깨를 당겨 올린 모습이고, 옆에서 보면 막 날개를 펼치며 도약하는 모습이다. 바위 꼭대기에 서면 비학산정상은 물론, 파평산 어깨너머로 개성의 군장산과 송악산까지 잘 보인다.

매바위 측면

매바위 측면

매바위 정면

매바위 정면

장군봉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초리골

장군봉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초리골

장군봉(400m) 아래 장군바위전망대가 명당이다. 양쪽 능선과 초리골의 어울림은, 자웅산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온다. ​학이 초리골을 품어 안고 도봉산, 삼각산 저 너머로 날아오를 기세다. 전망대 바닥에 박힌 ‘파주 포토 10경’ 동판이 반갑다. 심학산과 율곡산에서도 낯을 익혔던, 사진 찍기 좋은 자리다.

비학산정상(454m)은 좌우 능선이 만나는 무인대피소에서 북쪽으로 0.5km쯤 된비탈을 타야 한다. 밧줄을 부여잡고 날선 바위너덜도 타넘어야 하는, 왕복 40분의 고생길이다. 정상전망대에서는 직천저수지 뒤로 우뚝 다가선 감악산과 아스라한 소요산의 자태가 볼만하다.

비학산 정상의 표지석

비학산 정상의 표지석

은굴의 역사를 안내하는 표지판

은굴의 역사를 안내하는 표지판

하산할 때는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타넘으며 쉬엄쉬엄 고도를 낮추게 된다. 은굴까지는 부드러운 흙 위에 낙엽이 폭신하게 깔린 비단길이다. 다급한 벼랑 아래에 ‘은굴의 역사’가 적혀 있다.

「은굴은 1900년도 초반 일제강금기때 은을 채광하였던 곳으로 굴의 길이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명주실 한타래 정도의 긴 굴로 추정하고 있으며, 채광중 붕괴사고로 인하여 수십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고함. 그후 다시 1960년대 은채취를 하였다가 폐광이 되었으며 빈번한 간첩의 침투로 인하여 군부대에서 굴입구를 콘크리트로 봉하여 지금까지 오고 있음.」

산에서 마주치는 안내판 대부분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예사로 무시한다. 꼭 그래야만 현장감이 돋보인다면, 할 말은 없다.

삼봉산1봉의 표지석에 파주시 주소가 적혀있다.

삼봉산1봉의 표지석에 파주시 주소가 적혀있다.

무장공비 김신조 침투로 안내판

무장공비 김신조 침투로 안내판

삼봉산1봉(282m)의 표지석에 새겨놓은 주소가 이채롭다.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산14번지. 무장공비숙영지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있다. 절벽 아래에는 친절한 안내판이 걸려 있다.

「무장공비 김신조 침투로. 나무꾼 우씨 4형제가 감금당했던 곳. 이곳은 1969년 1월 21일 북한 제124군 소속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이 대통령 관저 폭파, 정부요인 암살 등의 목적으로 황해도 연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잠입할 당시의 침투로로서 1월 19일 초리골에 살았던 우씨 4형제가 나무하러 왔다가 납치되어 감금당했던 장소입니다. 7시간 만에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우씨 4형제의 신고로 군경 비상 경계 태세가 발령되었으며 그 결과 침투하였던 무장공비 중 29명을 사살,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김신조)되었습니다.」

이제는 토씨조차 제자리를 못 잡아 잔뜩 꼬인 문장이 되레 친근할 지경이다.
1.21사태를 기점으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시행되었다.

초리연에서 건너다본 삼봉산

초리연에서 건너다본 삼봉산

초리골 주민의 20%가 단양우씨다. 우씨 집안 4형제 밑의 막내가 경영하는 초리연(두부요리)에서 건너다보는 삼봉산 경관이 일품이다. 의좋은 삼형제가 머리를 맞댄 듯, 볼수록 정답다. 1.21사태에서 혼자 살아남은 김신조 목사는 삼봉산을 자기 고향으로 여겨, 초리연을 찾곤 한단다. 53년 전 그때, 무장공비들이 삼봉산이 아니라 은굴에서 숙영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무장공비들이 우씨 형제들에게 경기도지사나 파주시장 벼슬을 약속하는 대신, 사형을 선고했더라면 또 어찌 되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암산의 정상 표지석에 적힌 파주시 주소

암산의 정상 표지석에 적힌 파주시 주소

고난의 행군은 삼봉산을 지난 다음부터 제대로 펼쳐진다. 암산까지 2.2km, 줄줄이 눈앞을 막아서는 연봉들 앞에, 해발고도는 의미가 없다. 난데없이 뾰족하게 일어서고, 느닷없이 날카롭게 주저앉는다. 이름 없는 것들도 울퉁불퉁 끼어든다. 숲 사이로 인가가 내려다보이고 개 짖는 소리 들려오긴 해도, 도움이 안 된다. 기진맥진하여 암산에 닿는 순간, 정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져버리고 만다.

암산 표지석에도 주소가 박혀 있다.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산25-1. 그곳에서 비학산을 돌아다보는 감회는 먹먹하다. 그러고 보니, 비학산 오른쪽날개는 이름이 셋이나 된다. 정상에서 은굴까지 5km는 비학산, 의좋은 삼형제처럼 예쁜 삼봉산, 길 건너 수산과 짝을 지어 자웅산이 되는 암산.
총 12.5km, 휴식 포함 6시간 20분의 산행 끝이다. 자잘한 통나무계단이 비탈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지며 빗금을 친다. 이제는 학이 날아오르기 전에 땅을 디뎌야 한다. 저 아래 초계탕집 널따란 앞뒤 마당이 다 주차장이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