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날 운정지구에서 북쪽 창을 열면 잘생긴 산 하나가 다가선다. 금빛 어깨띠를 빗겨 두른 금병산(錦屛山, 294m)이다. 파주에서 높이 1, 2등을 다투는 감악산(674m)과 고령산(622m)의 중간에 끼어서도 당당하다.영조가 생모 숙빈최씨 묘소인 소령원에 왔다가 말구리재(몹시 가팔라서 말이 구른다는 고개)에 올라서서 ‘앞에 보이는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고, 신하가 ‘낙엽이 떨어져나간 형상이라서 풍락산이라 불립니다’ 하자, ‘비단으로 병풍을 친 것 같으니 앞으로는 금병산이라 부르라’고 명했다는 전설이 있다.

영조가 감탄했던 '비단병풍을 친듯' 한 금병산

영조가 감탄했던 '비단병풍을 친듯' 한 금병산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지만, 당장에 비단병풍 속 세상을 걸어보고 싶었다. 지도마다 단골로 표시된 등산로입구인 ‘백경수상회’를 찾아갔다. “40년도 훨씬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덕분이지요. 예전에, 집 뒤로 흐르는 개울이 하도 맑아서 ‘하얀 명경 같은 물’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 ‘백경수(白鏡水)’랍니다.”유명해진 연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주인아주머니의 대답이었다.
그 오랜 세월, 금병산 오르는 길 묻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불문곡직, 나를 앞마당으로 이끌었다.“저기 다리가 보이지요. 저 발랑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낚시터 가는 샛길이 있고, 반대편에는 ‘연안이씨묘역’으로 가는 샛길이 있어요. 그 시멘트포장도로를 쭉 따라가면 됩니다.”파주의 산을 오르다 보면 ‘달걀과 닭의 우화’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조상 묘를 잘 가꾸는 집안이 번성한 것일까, 집안이 번성하니까 조상 묘를 잘 가꾼 것일까. 청백리 이후백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

정상 정자

정상 정자

백경수상회

백경수상회

갔던 길 되짚어 오지 않을 바에는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게 좋았다. 차를 세우고 황톳길 언덕을 올라서자, 금병산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왼쪽 산 정수리에 정자가 서 있는데,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연봉의 곡선이 아름다웠다. 영조가 ‘비단 병풍을 친 듯’이라 감탄했던, 여섯 폭은 됨직한 병풍이었다.왼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골프장을, 왼쪽으로는 광탄인쇄단지를 내려다보면서 걷는 능선길에는 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1시간 반쯤 지났을까. 철탑이 숲을 헤치고 솟아올랐다. 멀리 적성 쪽에서부터 성큼성큼 산 넘고 물 건너 운정지구로 질러가는 고압선이었다.

운정에서 바라본 금병산

운정에서 바라본 금병산

금병산 등산로

금병산 등산로

노고산갈림길로부터 다시 1시간 반. 철탑 아래 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어둔동입구를 지나고, 오르막을 치달아 금병산 정상에 다다랐다. 정자 앞에 서자 왼편으로는 파평산 동봉과 서봉, 정면으로는 삿갓처럼 뾰족한 고령산 앵무봉이 쫙 펼쳐졌다.채석장 앞으로 다가서서 둘러보고 내려다보았다. 벼랑은 넓고 깊었다. 양쪽 비탈에서는 단단한 청석이, 가운데 둔덕에서는 붉은 푸석돌이 켜켜이 갈라지면서 까마득한 골짜기 아래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너무 크게 벌어진 상처였다. 아물릴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릴없이 5년 전의 신문기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금병산이 무너져 내리면서 주변 경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산사태까지 우려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주민들에 따르면 40여 년 전 S건설이 이곳에서 구들장을 캐냈다고 한다. 그 뒤 20여 년 전에 복구를 마쳤으나 계속 토석이 벌겋게 흘러내려 주변의 짙은 녹색과 확연히 대비되자 바위에 녹색 페인트를 덧칠했단다. ‘눈 가리고 아웅’식 복구공사였던 셈. 그로부터 금병산은 다시 채석장을 운영하기라도 하는 듯 계속 무너져 내리면서, 현재는 정상 부근까지 쓸려 내려온 상황이다.」

늦은 시간에 시작한 등산이었으니 빠른 길을 찾아야 했다. 벼랑 끝 소나무 아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발랑1리를 바라고 오솔길을 미끄러졌다. 바위는 뾰족했고 납작납작한 돌조각은 날카로웠다. 1시간 반 뒤, 연안이씨묘역에서 차에 올랐다. 6km 거리를 4시간에 주파한 산행이었다.

채석장

채석장

벼랑 끝

벼랑 끝

사흘 뒤, 이번에는 차를 몰고 ‘발랑리 50-1번지’까지 깊숙이 쳐들어갔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해서 정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길을 선택했던 것. 지난번 하산했던 길과 정상에서 창만5리로 이어지는 길의 중간으로 뚫린 짧은 등산로였다‘금병재’란 현판을 단 한옥 한 채가 가뿐하게 서 있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더듬다가 길을 놓치고 말았다. 등성이를 향하여 거미줄을 헤치고 가시나무에 긁혀가며 전진을 거듭했다. 등산로는 잘 가꿔진 무덤 옆을 지나고 있었다.산 아래서 정상까지의 최단거리를 선택할 때는, 꼭 그만큼 가파른 길이라는 점을 각오해야 하는 법이다.

발랑1리 0.9km, 금병산정상 0.3km. 오래지 않아 나타난 이정표가 그걸 예고했고, 죽은 말뚝과 산 나무를 얽으며 뻗어간 안전줄이 그걸 증명했다.한 발짝씩 고도를 높이는 데 안간힘을 쏟는 사이, 이마 위로 하늘이 떴다. 공제선에 올라서자, 채석장 절개지 꼭짓점이었다. 이번에도 상처를 치유해볼 뾰족한 수는 안 보였다. 소나무에 기대선 이정표에는 정상 0.05km라 적혀 있었다. 50m라고 하면 쉬우련만, 모든 거리를 km 하나로 통일한 담당자의 얼굴이 궁금해졌다.이번 목적은 절개지 탐사였다. 정상 표지의 반대편, 절개지에 바짝 붙었다.
가능하면 절개지 아래 현장막사까지 내려가 볼 작정이었지만, 불가능했다. 굽은 소나무와 잡목들 사이로 켜켜이 쌓인 바위 조각과 돌 부스러기들이 제멋대로 미끄럼을 탔다. 돌아보니 100m쯤은 내려온 듯싶었다.
길이 끊겼으니 지친 몸을 이끌고 되짚어 올라가야만 했다.저절로 발밑의 돌들을 살피게 되었다. 납작하고 얇은 바위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금병산은 구들장으로 쓰라고 준비해둔 건축자재였는지도 몰랐다. 그게 바위든 나무든 사람이든, 쓸모가 있으면 손을 타게 마련. 금병산이 깎이고 무너지며 벼랑을 만든 건 자신의 내부에 쓸모 있는 보물을 지닌 업보일 수도 있었다.

정상 정자에서 돌아보니, 산행시간이 2시간이 넘었다. 올라오는 데 1시간쯤, 벼랑 끝을 헤맨 시간이 1시간쯤. 다시 1시간 뒤 ‘금병산 산림공원 등산로 안내’ 표지판 옆으로 빠져나왔다. 삼방리고개였다. 500m는 족히 걸어 내려가 ‘미니스톱’ 편의점에 닿았다. 얘기꽃 피우던 주인여자와 이웃여자 사이에다 금병산을 슬쩍 던져보았다.“우리가 여기로 이사 온 20년 전에, 채석장은 이미 폐쇄돼 있었어요. 원래의 주인은 산을 팔고는 화병이 나서 죽었다고 해요. 쓸모없는 산인 줄 알았는데, 보물덩어리였던 거지요. 예전에는 집 지을 때 구들장이 꼭 필요했잖아요. 여기서 파낸 구들장 수천 트럭이 서울로 실려 갔다고 하더라고요.”‘발랑리 50-1번지’까지 걸어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택시에 올라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차창으로 빛이 반짝 스쳤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니, 방축사거리였다. 황금빛 어깨띠를 두른 금병산이 거기 있었다.
허난설헌의 시 유선사(遊仙詞)가 뜬금없이 주르르 떠올랐다.

하늘꽃 한 송이 아름다운 벼랑 서쪽에 피었는데
길이 남교로 들어서자 말이 우는구나
옥공이 옥절구를 남겨 두어서
계향 그윽한 어스름 달밤에 선약을 넣고서 찧네

天花一朶錦屛西
路入藍橋匹馬嘶
珍重玉工留玉杵
桂香烟月合刀圭

허난설헌의 금병(錦屛)은 ‘아름다운 벼랑’이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금병산의 벼랑도 아름다웠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