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용연

파평용연

파평산 기슭에는 사철 내내 서슬 푸른 기운이 넘쳐나는 연못이 있다. 신라 진성왕 7년(893년)에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 탄생했다는 설화가 깃들인 파평용연이다. 이 고장에 터를 잡은 후손들은 윤관장군을 필두로 수많은 나라의 동량을 배출했다. 게다가 1459년에는 세조가 정희왕후(파평윤씨)의 친정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원평도호부’를 ‘파주목’으로 승격시켰다. 그때까지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던 원평도호부가 정3품 목사가 다스리는 파주가 된 것이다. 그런저런 사연들로 추론해 본다면, 파평산이야말로 파주의 뿌리 아니겠는가.

등산로입구

등산로입구

2코스에 있는 참호

2코스에 있는 참호

3코스 계곡길 (2월 하순)

3코스 계곡길 (2월 하순)

눌노리 파평체육공원에서 100m쯤 직진하면 ‘파평산토지지신’ 비석이 반겨 맞는다. 등산로 1코스, 2코스, 3코스의 출발점이다.
첫 산행은 봄기운이 땅거죽을 간질이는 2월 하순. 골짜기 초입에서 만난 사방댐이 낯설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양쪽 산허리를 꽉 문 채로 버티고 서있었던 것. 그 어떤 홍수나 산사태가 닥쳐와도 기어이 막아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사방댐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을 에돌아 오르니, 1코스 계곡길과 2코스 능선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였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쉬던 산객을 만났다. 장파리에 사는 성혼선생 후손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더니, 1코스 계곡길로 앞장을 섰다.

파평산 등산로

파평산 등산로

사방댐

사방댐

늙은 소나무는 비탈을 내려오는 중이고 젊은 참나무들은 언덕을 올라가는 참인 듯싶은데, 가만가만 흔들리는 가지 끝에는 뻥 뚫린 하늘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최단거리 등산로를 선택한 덕분에 4개 코스가 한데 모이는 곳, 팔각정자까지 1시간 남짓밖에 안 걸렸다. ‘평화의 쉼터’ 표지판 옆 이정표에는 정상까지 290m라고 적혀 있었다. 결코 얕잡아볼 거리가 아니었다. 언덕은 가팔랐고, 비어 있는 군부대 막사 입구를 지난 다음부터는 짧지 않은 나무계단들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길게 뻗어갔다.

출입이 허용된 동봉 정상(479m)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시야가 확 트였다. 오른편으로 모형 미사일이 서 있는 중봉(449m)과 군부대가 자리 잡은 서봉(495.9m)이 한눈에 잡혀왔다.
마지막 계단 위에는 정상표지석과 산불감시초소가 나란히 서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정상표지석부터 카메라에 담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성혼선생 후손이 해설을 달았다.
“저 건너 서봉이 진짜 파평산 정상이지요. 거기를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으니, 여기에 495.9m짜리 가짜 정상표지석을 세워서, 등산객들 증명사진을 박게 해주자는 배려라고나 할까요.”
전망은 빼어나서 임진강 건너로 북한의 기정동마을, 개성공단, 송악산, 닭벼슬봉 들이 주르르 달려들었다. 누가 이 아름다운 강산을 갈라놓았단 말인가. 감탄과 원망이 교차하는 사이, 성혼선생 후손이 감시초소 뒤쪽으로 이끌었다.

“전망이라면 이쪽도 빼놓을 수 없지요. 중봉과 서봉은 물론, 비학산 감악산 고령산 북한산까지 한 줄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기, 양쪽 벼랑 사이로 중봉까지 쫙 뻗어간 좁다란 능선이 주마대랍니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 말을 훈련했다는 치마대는 저 건너 서봉 어딘가에 있겠지만, 아쉬운 대로 이곳 주마대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성혼선생 후손의 해설이 느닷없이 주마대를 내달려 50여 년 전으로 훌쩍 건너뛰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은 덕천리 쪽 4코스와 법원읍 웅담리에서 올라오는 군사도로가 더 있지요. 1968년 1월 하순, 개성에서 출발한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얼어붙은 임진강 고랑포를 건넌 뒤 곧바로 파평산으로 올라붙었다고 해요. 저 아래 타이거CC 옆 포수바위, 등산로 4코스, 군사도로를 통과해서 비학산으로 건너갔다지요. 그들은 파평산 비학산 삼봉산 노고산 팔일봉 고령산 북한산비봉을 거쳐 자하문까지, 30kg 완전군장을 갖추고 평균시속 12km로 내달렸답니다. 청와대를 까겠다고 말이지요.”
털어놓자면 끝도 없을 사연을, 마주보고 고개 끄덕이며 줄였다.

동봉에서 바라본 중봉과 서봉정상

동봉에서 바라본 중봉과 서봉정상

동봉정상

동봉정상

멀리 보이는 북한산

멀리 보이는 북한산

주마대

주마대

성혼선생 후손은 한동안 말을 끊고 계단을 내려가더니 교통호로 들어섰다. 남들 모르는 곁길이 있다고 했다. 텅 빈 군부대 막사를 지나자 다급한 내리막 경사로였다. 피가 거꾸로 쏟아질 지경이건만, 오래 묵은 시멘트 포장도로는 제멋대로 몸을 뒤틀고 휘어졌다. 군용차가 그 길로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날랐으리라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되지 않았다. 30분쯤 내려가서 어지럼증에 익숙해질 무렵, 세 갈래 길에 닿았다. 군사도로는 왼쪽으로 꺾여 법원읍 웅담리로 향하고, 오른쪽 샛길은 3코스 등산로에 이어졌다.
“이쪽 3코스는 1코스보다 골이 깊고 길어서 사철 물이 흔하답니다. 왼쪽 군사도로를 따라가면 미타사나 서봉 정상의 군부대로 갈 수는 있지만 퍽 험난하지요.”
얼음 녹은 물이 또 얼음을 갈라 길을 내며 흘렀다. 등산로는 물소리를 벗 삼아 바위너설과 나무 그루터기를 누벼가며 굽이쳤다. 사방댐은 그 골짜기에서도 양쪽 산허리를 꽉 문 채 버티고 서있었다.

동봉 정상을 떠난 지 2시간여 만에 팔각정자에서 내려오는 군사도로와 만났다. 그곳은 비석과 상석이 널려 있는, 죽은 자들의 도시였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란 나온 왕재덕이란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그분이 이곳 산자락을 사서 고향사람들에게 내줬다고 해요. 황해도 신천군 추모공원이랍니다. 저 아래에는 봉영사란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삼성각만 남아 있답니다. 토지 주인과 송사를 벌인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천막을 뒤집어쓰고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파평산은 부처님이 머물기에 썩 좋은 데는 못되는 듯합니다. 봉영사도 그렇거니와 서봉 쪽 미타사도 그러니까요.”

30분 남짓 만에 등산로 입구에 닿았다.
“실은 제 나이가 70줄이랍니다. 양쪽 무릎은 모두 인공관절 수술을 했지요. 덕분에 거의 매일 파평산을 오르내린답니다. 수술은 두려웠지만, 앞으로 10년은 거뜬하다더군요.”
성혼선생 후손의 작별인사였다. 무릎 걱정일랑 하지 말고 열심히 등산을 하라는 당부였다. 귀 얇은 탓에 그 말에 고무되어 이튿날 즉시 용기를 냈다.
미타사는 윤관장군의 아들 금강거사 윤언이가 건립했다던가. 처음에는 금강사란 절의 현판을 걸고 윤관장군 초상을 모셨는데, 훗날 이름이 미타사로 바뀌었다던가. 1198년에는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이 권력다툼으로 아우 최충수를 그곳에서 죽였다던가. 전설은 여러 갈래였다.
족히 3시간을 투자한 미타사 왕복이었으나, 얻은 것은 별로였다. 기상관측소 옆 비탈로 수백 미터를 내려가야만 했고, 돌아올 때도 밟았던 길을 되밟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1000년 전 고려시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웅전도 삼성각도 샌드위치패널 막사였다. 삼성각에 걸린 윤관장군 초상은 조잡하기까지 했다.

6.25전쟁 때 전소된 절터에 복원은 했으나, 여건은 옴치고 뛸 수 없는 신세였을 것이다. 차량이든 사람이든 웅담리 쪽 군사도로 입구에서, 군부대 허락을 받아야만 통행이 가능했다. 비켜갈 길조차 마땅찮은 좁고 가파른 언덕으로 차를 몰아야 하는 모험은 필수조건이었다. 신도가 늘어날 까닭이 없고, 시줏돈 모일 리도 없었다.
마당 귀퉁이에 눈비 맞고 널려있는 탑이며 돌부처도,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있는 꼴이었다. 그나마 탑 앞의 부도 하나가 수백 년 세월을 삭힌 보물일 듯싶었지만, 진가를 헤아릴 도리는 없었다.

미타사 탑과 부도

미타사 탑과 부도

미타사 윤관장군 초상

미타사 윤관장군 초상

봉영사 삼성각

봉영사 삼성각

봄이 가고 여름이 무르익는 사이, 몇 번이고 파평산을 오르내렸다. 두 번째는 2코스 능선길로 올라갔다가 군사도로로 내려왔는데, 2시간여 정도로 충분했다. 그 뒤로는 내키는 대로 아무 데로나 혼자서도 잘 다닌다. 능선길은 전망이 트여서 힘든 줄을 모르겠고, 하늘 맑은 날은 미답의 북한 땅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