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는 한반도의 평화수도로서, ‘판문점’을 품고 있다

파주시청 홈페이지의 첫 장 첫머리 글자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반도 평화수도’다. 그처럼 파주의 앞에는 ‘한반도 평화수도’라는 말이 붙는다. 파주는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했을 때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한 수도 격이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파주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 남북 분단 비극의 시발이 되었던 38선과 현재의 휴전선이 최대로 겹치는 유일한 남한 지역이다. 타 지역들은 38선이 그어질 때는 모두 이북 땅이었다.

38선과 휴전선 접경 지역들

38선과 휴전선 접경 지역들

‘한반도 평화수도’란 말을 곰곰 되짚어보면 현재는 준전시 상태로서 비평화 시대라는 의미도 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금도 6.25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채 잠시 전쟁을 멈추고 있는 정전(停戰) 상태에 있다.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문서가 바로 6.25정전협정이다. 그 정전협정이 6.25전쟁 발발 후 3년여 만에 최종적으로 체결된 곳이 ‘판문점’이다. 현재의 판문점 위치와는 조금 다른 곳이지만.

이 판문점은 파주시 행정구역에 속해 왔다. 2020년 말에야 공식적으로 ‘파주시 진서면 통일로 3303’의 지번을 비로소 갖게 되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토록 익숙하게 불리던 판문점이 그동안 ‘번지 없는 주막(?)‘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데 아래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판문점’에는 세 가지가 있다: 널문리, 천막 회담장, 그리고 현재의 판문점

판문(板門)은 ’널문‘의 한자 표기인데, 이 말의 유래는 선조의 비참한 의주 피란행에서 비롯되었다.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허겁지겁 떠나다 보니, 임진강을 건널 다리 하나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인근 동네의 문짝들을 뜯어 임시로 뗏목 다리를 만들어 건너야 했다. 후대에서는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백성들이 자진하여 그리했다고 하고 있으나, 당시 광탄의 혜음령 고개를 넘을 때 백성들이 대놓고 울부짖으며 임금을 향해 비난한 것과, 도강 후 임금의 수라까지도 달려들어 훔쳐 먹어댄 군사들의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그 실상을 담아낸 유성룡의 <징비록> 내용에 비춰보면 그것은 후대의 미화일 가능성이 높다.

문짝을 뜯어 뗏목 다리를 만드는 백성들(그림: 정서용. 조선일보 2018.5.1.)

문짝을 뜯어 뗏목 다리를 만드는 백성들(그림: 정서용. 조선일보 2018.5.1.)

선조가 그처럼 고생하면서 건너 이른 곳이 현재의 초평도 맞은편의 동파리다. 강은 건넜지만 임금이 머물 곳 하나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서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관사)까지 뜯어서 태우며 몸을 녹여야 했다. 그 당시 임금을 마중 나온 장단부사 등이 수라를 준비했지만, 그것을 군사들이 다 훔쳐먹어 없앴다고 징비록은 적고 있다.

선조가 묵었던 동파역 흔적. 관사까지 뜯어 태운 탓인지 남은 게 거의 없다.

선조가 묵었던 동파역 흔적. 관사까지 뜯어 태운 탓인지 남은 게 거의 없다.

그 뒤 선조는 현재의 해마루촌 읍내 사거리를 지나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재의 JSA부대 지역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 <징비록>의 내용대로 선조의 행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벽제관(고양리) ⇨광탄(혜음령) ⇨용미리 ⇨임진나루 ⇨동파역[진동면 동파리. 현재의 초평도 전망대에서 강 건너 북쪽으로 보이는 지역] ⇨ 해마루촌[진동면 높은음자리길 155] ⇨진동면 읍내 사거리를 지나 북서쪽으로 전환하여 JSA부대 ⇨판문점 ⇨개성. 이는 당시 쓰이던 의주행 길이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던 때문이기도 했다. 이 행로와 관련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인근 지역의 사진과 북행로 등을 보이면 이렇다.

해마루촌과 판문점. 왼쪽 상단부에 판문점, 중앙부에 해마루촌과 초평도가 보인다.

해마루촌과 판문점. 왼쪽 상단부에 판문점, 중앙부에 해마루촌과 초평도가 보인다.


현재의 북행길(연두색)과 조선시대의 의주행로(파란색)는 달랐다.

현재의 북행길(연두색)과 조선시대의 의주행로(파란색)는 달랐다.

그러나 선조가 거쳐간 진동면에는 ‘판문[널문]리’가 없다. 선조 이후에 편간된 모든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판문점이 소재한 진서면 어룡리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속칭으로 ‘널문다리’만 남아 있다. 즉, ‘판문[널문]’이 실제의 지리적 명칭으로 굳어지려면 선조가 건넜을 임진나루 근처인 장산리나 초평도 어느 지점에 그 이름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없다.

즉 선조가 거쳐간 ‘판문[널문]리’는 사라지고 명칭만 야사에 새겨져 떠돌았다. 거기에 길거리 주막을 뜻하는 ‘점(店)’이 붙어 ‘판문점(板門店)’이 되었다. 훗날 썰렁한 벌판 길거리에 천막만 쳐놓고 시작한 정전회담 장소에 이름이 없자, 회담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널문 주막(板門店)’이라는 이름을 편의상 차용하여 쓰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당시의 결정권자인 군인들이 그런 깊은 의미까지 생각했을 리도 없다. 그처럼 ‘널문[板門]’은 지명만으로도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이다. 6.25 직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仙跡里)와 개풍군(開豊郡) 봉동면(鳳東面) 침송리(針松里)의 경계 지역에 위치했던 자그만 농촌 마을이 전쟁 통에 그만, 한참 남쪽에서 빌려 온 ‘판문점’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그렇게 해서 달게 되었다. 즉, 북한 측이 제시한 지명 ‘판문점’은 선조의 ‘널문리’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선조의 야사에 담긴 지명 ‘널문(판문)’을 빌려다 붙여 사용하고 있던 명칭이었다.

세 군데를 떠돈 정전회담 장소: 개성, 벌판 천막, 역사 속의 ‘판문점’

정전회담은 전쟁 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7월 8일 예비회담이 열렸고 1차 본회의가 이틀 뒤에 열렸다. 당시만 해도 그 회담이 본회의 159회를 포함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지리한 2년여의 밀고 당기기가 되리라고는 쌍방 모두 예측하지 못했다.

첫 만남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고급 음식점 내봉장(來鳳莊)에서 이뤄졌다. 당시 대표단을 싣고 온 북한군 운전병은 미군 군화를 신고 있었고, 북한군 여성 통역원은 미군 장성을 환하게 웃으며 맞았으며, 취재 기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머나먼 미로에 들어서는 첫 발걸음의 일부일 뿐이었다.

1951.6. 회담장으로 내정된 내봉장을 미리 둘러보는 중국군총사령관 펑더화이. 그는 실제 회담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1951.6. 회담장으로 내정된 내봉장을 미리 둘러보는 중국군총사령관 펑더화이. 그는 실제 회담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내봉장으로 들어오는 북한군 지프. 당시 운전병은 미군의 군화를 신고 있었다.

내봉장으로 들어오는 북한군 지프. 당시 운전병은 미군의 군화를 신고 있었다.

1951.7. 대표단을 싣고 온 미군 헬기 조종사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 북 통역원

1951.7. 대표단을 싣고 온 미군 헬기 조종사를 환한 웃음으로 맞는 북 통역원

개성회담 장 밖에서 웃고 있는 종군기자와 북 통역원

개성회담 장 밖에서 웃고 있는 종군기자와 북 통역원

[출처: 회담 관련 흑백 사진의 출처는 모두 미국 국립기록문서관리청(NARA). 이하 같음]

당시 중국군 대표들까지 거느리고 수석대표로 나타난 남일(1913~1976)은 특이한 걸물이었다. 소련에서 정식 대학(수학교육과)까지 마치고 주(州) 교육장까지 승승장구한 그는 소련의 추천으로 한 살 연상의 김일성을 보좌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들어와 교육성 부상(副相)에 오른 뒤 두 해 만에는 전쟁 중 급사한 강건을 이어 북한군 2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군 경력이 전혀 없음에도. 그만치 그는 지략과 배짱을 두루 갖춘 이로 호랑이와 여우를 합해놓은 인물이었다.

중국 대표(좌의 둘)을 거느리고 수석 대표로 참석한 남일(중앙). 당시 40세.

중국 대표(좌의 둘)을 거느리고 수석 대표로 참석한 남일(중앙). 당시 40세.

남일은 외모로는 매우 깔끔한 지성파 미남형이었다.  실제로 그는 훗날 소련 대학에서 외교학도 강의했다.

남일은 외모로는 매우 깔끔한 지성파 미남형이었다.
실제로 그는 훗날 소련 대학에서 외교학도 강의했다.

개성회담 당시의 한미 대표. 행크 호디스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연락관 이수영 대령, 백선엽 장군(당시 31세로 영, 중, 일의 3개 외국어에 능통했고, 미국 측에서 가장 신임했다.)

개성회담 당시의 한미 대표. 행크 호디스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연락관 이수영 대령,
백선엽 장군(당시 31세로 영, 중, 일의 3개 외국어에 능통했고, 미국 측에서 가장 신임했다.)

회담장이 허허벌판 판문점으로 옮겨진 뒤 양측은 야외에서도 설전 중이다.

회담장이 허허벌판 판문점으로 옮겨진 뒤 양측은 야외에서도 설전 중이다.

당시 미군과 한국 대표로 회담에 참여한 미군 장성들과 30대에 대장에 오른 백선엽 장군은 그를 보면 고개부터 설레설레 저었다. 곱상한 미남임에도 면전에서 거친 욕설도 뱉고 고성으로 응수하는가 하면, 사석에서는 파이프 담배를 즐기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무마하고자 호디스 장군이 미제 궐련을 권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까서 파이프에 담아 맛있게 피우면서, ‘나는 지금 미제국주의를 태우고 있소’라고 해대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군이 회담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한 것은 당시 미군 대표들이 휴전의 상징인 백색 깃발을 차 앞에 달고 가자 그것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항복 깃발’이라고 북한 매체들이 해외에 선전한 탓도 있었지만, 남일의 그와 같은 강골형 분위기 조장에 겁을 먹은 탓도 있었다.

이것이 북한 측이 미군의 항복 표시라 선전해댄 흰색 깃발이다.

이것이 북한 측이 미군의 항복 표시라 선전해댄 흰색 깃발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이 제안해 온 곳이 이른바 두 번째의 회담장 ‘널문 주막(板門店)’이었다. 길거리에 초가 몇 채만 있고 나그네를 상대로 술을 팔던 주막도 있었지만, 주변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북한 측은 천막 막사를 지었고, 미군은 그 뒤로 그곳에 목제 가건물을 짓게 된다. 현재의 판문점보다는 북서쪽으로 1.5km 위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허허벌판에 천막으로 급조한 초창기에는 길 건너에 초가집 몇 채만 있었다.

허허벌판에 천막으로 급조한 초창기에는 길 건너에 초가집 몇 채만 있었다.

그 후 미군들이 목재를 들여와 경비병 막사와 회담장을 지었다. 중앙의 사각 건물. 헬기가 있는 쪽이 문산 방향이다.

그 후 미군들이 목재를 들여와 경비병 막사와 회담장을 지었다. 중앙의 사각 건물.
헬기가 있는 쪽이 문산 방향이다.

그러다가 기자들의 취재가 늘어나고 해외의 이목을 끌게 되자 미군 측은 회담장을 크게 증축하게 된다. 공사용 자재들이 건축 현장 이곳저곳에 있는 게 보인다.

그러다가 기자들의 취재가 늘어나고 해외의 이목을 끌게 되자 미군 측은 회담장을 크게 증축하게 된다.
공사용 자재들이 건축 현장 이곳저곳에 있는 게 보인다.

1951년 10월 5일 회담 장소 이전을 결정하여 10월 25일 첫 회담이 열렸고, 그 뒤로 21개월의 지리한 설전이 그곳에서 펼쳐지게 되는데, 현재는 그럴 듯한 목조 건물로 개수하여 북한 측에서 미군이 항복한 곳이라면서 관광지로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 판문점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은 정전회담에서 확정된 경계선에 따르면, 실제로 회담이 열리고 서명까지 했던 그 널문주막 위치가 북한 쪽에 속하게 돼서였다.

1953.7. 남측의 해리슨 중장과 북측의 남일 대장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이 서명 장소가 위 사진 속에 새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다.

1953.7. 남측의 해리슨 중장과 북측의 남일 대장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이 서명 장소가 위 사진 속에 새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다.

현재는 이 협정 조인장이 북측에 남아 있다. 사진에서 보이듯 말끔히 개보수해서 관광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는 이 협정 조인장이 북측에 남아 있다.
사진에서 보이듯 말끔히 개보수해서 관광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정전회담 역사상 ‘판문점’으로 단순히 표기되는 실제 장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된다. 통일부의 DMZ 관광센터에서의 설명도 같다: 애초의 개성 내봉장, 실질적인 회담장이었던 허허벌판의 ‘널문주막(板門店)’, 그리고 정전협정 체결과는 무관한 현재의 중립지대에 위치하는 판문점.

현재의 판문점 내 시설 배치도

현재의 판문점 내 시설 배치도

북쪽에서 촬영한 남측의 <자유의집>. 가장 흔히 보는 것은 남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북한의 판문각이 보이는 사진들이다.

북쪽에서 촬영한 남측의 <자유의집>. 가장 흔히 보는 것은 남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북한의 판문각이 보이는 사진들이다.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소재의 현 판문점이 ‘파주시 진서면 통일로 3303’이라는 지번을 갖기까지 67년이 걸렸다. 지번(도로명 주소)이 확정되려면 공부(公簿)상의 지적(地籍)이 명확히 정리돼야 하는데 해당 지역이 중립지대 내에 속한 것이어서 미등록 토지였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파주시가 이 판문점과 인근 남측 지역(진서면 선적리와 장단면 덕산리 일원)의 135필지, 59만 2천여 ㎡의 지적 복구를 마치면서야 비로소 떳떳한 주소를 갖게 되었다.

회담장의 명칭과 주소지 확정 하나만으로도 사연 많았던 정전회담은 그 결말도 크고 작은 수많은 사연을 남기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이었던 대한민국과 미국은 협정문 서명에서 제외되고(미국의 클라크 대장은 연합국사령관 지위로 서명했다), 한글 원본은 대한민국에 없는데(북한 측 보관) 그 원본에 사용된 한글 타자기는 공병우 박사가 발명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정전협정 체결 사실을 최초로 외부로 타전한 이는 국민 MC 송해인데, 당시 그는 판문점에 파견된 무선 통신병이었다. 또 클라크 대장이 후에 매스컴용으로 목조건물 안에서 영문 협정문 서명 장면을 촬영한 것과는 달리, 그가 실제로 먼저 서명한 곳은 문산극장의 소형 탁자에서였다. 그 탁자는 현재 전쟁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음 편에서 상세히 다뤄진다(계속)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