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선조가 거쳐간 진동면에는 ‘판문[널문]리’가 없다. 선조 이후에 편간된 모든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판문점이 소재한 진서면 어룡리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속칭으로 ‘널문다리’만 남아 있다. 즉, ‘판문[널문]’이 실제의 지리적 명칭으로 굳어지려면 선조가 건넜을 임진나루 근처인 장산리나 초평도 어느 지점에 그 이름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없다.
즉 선조가 거쳐간 ‘판문[널문]리’는 사라지고 명칭만 야사에 새겨져 떠돌았다. 거기에 길거리 주막을 뜻하는 ‘점(店)’이 붙어 ‘판문점(板門店)’이 되었다. 훗날 썰렁한 벌판 길거리에 천막만 쳐놓고 시작한 정전회담 장소에 이름이 없자, 회담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널문 주막(板門店)’이라는 이름을 편의상 차용하여 쓰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당시의 결정권자인 군인들이 그런 깊은 의미까지 생각했을 리도 없다. 그처럼 ‘널문[板門]’은 지명만으로도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이다. 6.25 직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仙跡里)와 개풍군(開豊郡) 봉동면(鳳東面) 침송리(針松里)의 경계 지역에 위치했던 자그만 농촌 마을이 전쟁 통에 그만, 한참 남쪽에서 빌려 온 ‘판문점’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그렇게 해서 달게 되었다. 즉, 북한 측이 제시한 지명 ‘판문점’은 선조의 ‘널문리’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선조의 야사에 담긴 지명 ‘널문(판문)’을 빌려다 붙여 사용하고 있던 명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