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정전협정을 맺은 지도 이제 곧 68돌이 다가온다. 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7월에 시작되어 정확히 2년 뒤에 종결된 지리한 회담의 가시적 성과물로 남겨진 게 그 협정이다.

이 정전회담은 개성에서 시작되어 ‘널문주막(板門店)’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 ‘판문점’이라는 지명의 복잡한 유래에 대해서는 앞서 1편에서 살펴본 바 있다.

전쟁의 종식이 아닌 일시적 전쟁 중지를 뜻하는 이 정전협정은 그 과정만치나 복잡한 내역도 담겨 있다. 추리자면 다음의 몇 가지가 된다: 1)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이었던 대한민국과 미국은 협정문 서명에서 제외되었다. 2) 한글 원본은 대한민국에 없고 북한 측이 보관 중인데, 그 원본 작성에 사용된 타자기는 공병우 박사가 발명한 최초의 한글 타자기였다. 그 타자기의 최초 국산 제작품 중 하나가 파주에 있다. 3) 정전협정 체결 사실을 가장 빨리 최초로 외부로 알린 이는 국민 MC 송해다. 4)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협정문에 서명한 것은 문산극장의 소형 탁자에서였다.

이와 관련된 것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미국은 협정문 서명에서 제외되었다: 종전협정의 걸림돌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

이것이 6.25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이다. 이 긴 이름을 예시하는 이유는 협정 체결 당사자들을 밝히고자 함이다. 살펴보면 실질적인 전쟁 당사국이었던 대한민국과 미국은 없다. 그 반면에 또 다른 실질 당사자인 북한은 들어가 있다. 그것도 중국과 함께. 협정문에는 제목에서부터 Korea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건 대한민국의 의미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한반도를 뜻하는 한국일 뿐이다.

이런 사태의 시발은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 때문이었다. 한반도 통일을 지상 숙원을 삼고 있던 이 대통령은 정전을 통일의 숙적으로 여기며 반대했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 비밀리에 미군 특수 작전을 수행했던 한국계 특공대를 투입하여 회담장을 날려버리는 비밀 작전까지도 지시했을 정도였다. 맥아더도 거들었다. 이 대통령과 절친한 관계이면서 만주 폭격까지도 주장하는 바람에 훗날 마지막 5성 장군으로 쓸쓸히 퇴장하게 된 맥아더 또한 정전 반대편에 섰다. [이 대통령의 반대는 남한 측의 협정 불이행을 걱정하는 유엔군의 계속 주둔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술수였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조선일보는 그러한 협정 체결을 ‘기이한 전투’의 기이한 종막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조선일보 1953.7.29.자 기사(사진 송고 등으로 이틀 뒤에 보도되었다)

조선일보 1953.7.29.자 기사(사진 송고 등으로 이틀 뒤에 보도되었다)

이처럼 당사자가 빠진 기이한 협정은 오늘날 새삼 문제가 되고 있다. 적대 상황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종전 협정 체결의 근본적인 장애물이 되어서다. 종전 협정을 성사시키려면 정전 협정 체결의 당사자들이 나서야 한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여전히 비당사자인지라 북한과 중국, 유엔의 처분(?)을 바라야 하는 처지다(유엔이야 미국이 좌지우지하긴 하지만). 여하튼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끝까지 꼬이는 법이다.

한글 원본과 공병우 박사의 최초 발명품 한글 타자기

협정문 원본은 각각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작성되었다. 그때 새삼스럽게 걱정거리로 떠올랐던 게 한글본을 작성하기 위해 필요한 타자기였다. 미군 측은 당시 후진국이자 최빈국인 한국에 한글 타자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이 기우임을 증명한 게 공병우 박사가 공들여 개발한 공병우 식 타자기였다. 박사는 쓰기 에서의 기계화가 문명 발전의 속도를 좌우한다고 굳게 믿고, 바쁜 안과 개업의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한글 타자기 개발에 매달려 왔다. 1949년에 완성된 세벌식 모아쓰기 자판이 그 결실이었는데, 국내에서는 그걸 타자기로 만들 수 없어서 미국의 언더우드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그 시제품 3대가 나온 것이 전쟁 발발 전인 1950년 1월이었다. 그것들은 각각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 박사, 타자기 제작을 중개한 언더우드 3세(한국명 원일한 박사), 그리고 개발자 공병우 박사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협정문 한글본 작성이 필요할 때 그 협상에 수석 통역관으로 원일한 박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한글 타자기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당시 미군 측 참여자 하나는 한국과 같은 미개국에 고유한 문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타자할 수 있는 타자기가 있어서 무척 놀랐다는 기록을 미군 전사[한국전쟁사]에 남기기도 했다.

협정서 중 한글 원본 말미(서명 부분)

협정서 중 한글 원본 말미(서명 부분)

공병우 타자기는 그 후 미국 측의 부품을 받아서 국내 조립을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100% 국산화에 성공한 게 1970년이다. 그 첫 상표가 유니온(UNION)이었다. 말하자면 세벌식 한글타자기의 첫 순수 국산품으로, 정전협정문에 쓰인 공병우 타자기의 적장자인 셈인데, 그 유니온 시제품 타자기가 파주에 있다. 두루뫼박물관(법원읍 초리골길 278. 031 958-6101/2)에서 소장 중이다.

두루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공병우 타자기(유니온)

두루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공병우 타자기(유니온)

이 자랑스러운 한글 타자 원본은 유감스럽게도 평양에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사본뿐이다. 대한민국이 협정 당사자가 아니라서다.

국민 MC 송해도 6.25정전협정 조인식장에 있었다

이날의 정전협정 체결 소식을 전 세계에 가장 먼저 타전한 이는 국민 MC 송해(1927~ )다. 당시 그는 무선 통신병으로 협상 지원부대 소속이었다.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그는 무선통신 신호(모스)로 바쁘게 타전했다. 당시는 군 통신 이상으로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송해의 고향은 판문점에서 멀지 않은 황해도 재령이다. 구월산 일대의 공산당 유격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라면서 인사를 하고 고향집을 나선 것이 모친과의 마지막이었다. 그가 자원 입대를 했던 것도 모친을 뵙고자 해서였다고 한다. 송해는 당시에 타전했던 모스 부호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클라크 대장이 협정문에 서명한 것은 문산극장의 소형 탁자에서다

당일 협정문 서명장에서 서명한 것은 사진 속의 두 사람, 곧 북측의 남일과 유엔군 측의 해리슨 중장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정식 서명권자가 아니라 일종의 입회인 격인 '참석자(present)'들이었다.

남일과 해리슨 중장이 조인식장에서 서명하고 있다.

남일과 해리슨 중장이 조인식장에서 서명하고 있다.

이후 이 협정문들은 서명권자인 김일성/팽더화이와 클라크 대장의 서명을 위해 평양과 남쪽을 오간다. 먼저 클라크 대장이 서명을 했다. 그는 문산극장에 머물며 협정 조인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협정문이 도착하자 서둘러 서명했다. 바로 문산극장의 조그만 탁자 위에서. 그 탁자가 현재 전쟁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사진 속의 탁자다.

클라크 대장이 서명 때 사용했던 문산극장의 소형 탁자. 현재 전쟁박물관 보관

클라크 대장이 서명 때 사용했던 문산극장의 소형 탁자. 현재 전쟁박물관 보관

클라크 대장이 많은 취재진 속에서 서명하는 아래 사진은 기록용/보도용으로 촬영된 사진이다. 즉, 이미 서명이 이뤄진 상태에서 그런 역사적인 서명 장면을 남겨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홍보용으로 촬영되었다. 평양의 김일성과 팽더화이의 서명을 받은 협정문 영어 원본은 그다음 날 늦게 미군 측에 전달되었다. 협정 체결 사실 보도 일자에 협정문 실물 사진이 공개되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클라크 대장의 협정문 서명 사진(홍보용)

클라크 대장의 협정문 서명 사진(홍보용)

사연 많은 이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도 어언 68돌이다. 협정문의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한국(Korea)에서 이러한 정전협정은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동족상잔 악몽의 고해서(告解書)이므로.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