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유명인 묘역들

파주에는 두 군데의 왕릉(삼릉과 장릉) 외에도 유명인사의 묘가 적지 않다. 고려시대의 학자 겸 명장이자 파평 윤씨의 중시조인 윤관(광탄면 분수리. 사적 제323호)을 필두로, 조선조의 대표적 명재상인 방촌 황희(탄현면 금승리.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이율곡(자운서원. 법원읍 동문리. 사적 제525호) 등이 잇따르고, 조선조의 대윤/소윤 대치 사건을 치른 파평 윤씨 들도 파주에서 영면 중이다.

유명 여인들의 묘역도 있다. 추존되어 왕릉에 모셔진 한명회의 두 따님과 기생 출신으로 정실을 몰아내고 윤원형의 처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며 종1품 정경부인에까지 올랐다가 폐서인되는 바람에 사극의 단골이 된 정난정, 그리고 정식 처첩이 아님에도 끝까지 지극정성으로 정인을 보살펴서 후손들이 양반 사대부가의 묘지에 정식으로 모신 최초의 기생이었던 홍랑의 묘도 있다[이 여인들의 묘에 대해서는 이곳 <시민기자가 간다> 코너에서 ‘파주에 묻힌 여인들의 기구한 사연’(2021.01.13.)으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현대인 중에도 눈에 띄는 이들이 있다. 금년 3월호 <파주소식>에서 다뤘던 한글학자 겸 독립운동가 정태진(금릉), 그리고 이숭녕(조리읍)은 현대 국어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밖에도 사상계의 대표적 활동가였던 장준하 선생,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한국의 고교생 중 8할 이상이 그의 책으로 공부했다는 <정통 성문 영어>의 저자이면서 자신이 모은 국보 4점과 보물 22건을 기증하여 아름답게 마지막을 장식한 송성문(2011년 별세)도 파주에 잠들어 있다.

이러한 이들 중 이번 기사에서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극적인 배반의 삶을 연속으로 엮어낸 이효석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교과서에 실려 있는 명 단편이다. 그럼에도 소설가 김동리는 그를 두고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 했다. 그의 단편과 장편 사이에 보이는 현격한 작품성 차이 때문이다. 시인이 소설을 쓰듯 문장이 아름다운 단편들을 썼지만, 무엇보다도 서사 구조가 탄탄해야 장편에서는 항상 기승전결의 ‘결’ 부분에서 힘이 빠지고 흐지부지되어서다. 이효석의 장편이 박한 평을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효석은 작품을 배반했고, 삶에 배반당했다.

작품 속에서 한국의 토속적 색채를 강하게 그린 <메밀꽃 필 무렵>과는 달리, 실제 삶에서는 서구적인 문화를 매우 즐겼다. 빵과 버터, 커피 등을 즐겨먹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벽돌집, 서양 영화 감상 등에 심취했다. 이효석 문학재단에서는 아래와 같이 그의 삶을 요약하고 있다.

이효석의 실생활 단면들 (이효석 문학재단 제공 자료)

이효석의 실생활 단면들 (이효석 문학재단 제공 자료)

이효석 경성제대 재학 시절

이효석 경성제대 재학 시절

이효석은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동본인 이경원과의 결혼을 밀어붙인 시대의 반역아였다. 2차대전 중에는 생활고에 엄청 시달렸고 병에 걸린 자신의 아내와 차남을 살리고자 친일 행위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1940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당시 부인의 나이는 28살이었고, 차남 영주(煐周)는 생후 4개월 만이었다.

친일 행적을 두고 지인들 앞에서 이효석은 다음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

그러던 효석은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다가 1942년 5월 25일 한창 젊은 나이인 35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부친 이시후에 의해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되었다가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98년 9월에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이효석이 파주에서 영면 중인 사연

그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다. 현재 그의 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는 곳도 그곳이다. 그곳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봉평의 메밀국수를 대표 식품으로 내놓는다.

이효석문학관과 생가.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문학관과 생가. 평창군 봉평면

그럼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쉬던 그가 파주로 이주하게 된 것은 묘지 앞쪽으로 뚫리게 된 영동고속도로 때문이었다. 유가족이 묘지 이장을 구상하자 평창군에서는 반대가 극심했다. 당시는 이효석이 대표적 관광 상품(?)의 상징적 존재였으므로. 그걸 쿠데타군처럼 새벽에 기습적으로 강행하여 파주의 동화경모공원으로 모신 것은 장녀 나미 씨[2015년 사망]였다.

동화경모공원(탄현면 법흥리. 031-949-9668)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실향민 전용 묘지다. 이북5도민회가 이용자 자격 사전 관리를 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파주시민만은 이용이 가능한데, 사전에 파주시청 사회복지과에서 ‘묘지사용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강원도 태생인 이효석이 이북 출신 전용 묘지에 묻힐 수 있던 것은 부인 이경원이 이북 출신이었던 덕분인데, 현재는 함남 출신 묘역에 배치돼 있다.

동화경모공원에 이장된 이효석/이경원 부부 합장묘 [함남 구역. 나열 78호]

동화경모공원에 이장된 이효석/이경원 부부 합장묘 [함남 구역. 나열 78호]

참고로 이 동화경모공원은 사진에서처럼 출향 지역별로 구역이 지정돼 있다.

유일한 실향민 전용 묘지인 <동화경모공원> 묘역 배치도. 파주 시민용 구역도 특별 배정돼 있다.

유일한 실향민 전용 묘지인 <동화경모공원> 묘역 배치도. 파주 시민용 구역도 특별 배정돼 있다.

이효석은 학창 시절 내내 서구문학을 탐독하면서 문학적 토양을 길렀고, 대학 학사 논문조차도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의 희곡론을 영문으로 써냈다. 그런 탓에 실제의 삶에서는 서구적 취향 일색이었다. 그런 이효석이 작품 속에서는 반대로 가장 한국적인 토속미를 그렸다. 그것도 소설가가 시인 같은 아름다운 문장에 주로 치중하여...

처자식을 위해 친일 행위까지 했음에도 그는 처자식을 앞세워야 했고, 그 자신도 부친에 앞서갔다. 강원도민으로, 강원도의 대표적 인물로 받들리는 그는 현재 경기도 파주에서 영면 중이다. 그의 생이 소설을 배반했듯, 그의 생은 그를 배반했다.

끝으로 장준하 선생의 묘역(장준하공원)에 대한 이야기는 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기일(8.17.)에 즈음하여 다루고자 한다. <끝>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