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산 들머리에는 통일신라 시절 도선국사가 창건한 보광사가 있다. 조선왕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동이)가 잠들어 있는 소령원의 원찰로 더 유명해진 천년고찰이다. 해탈문 옆으로 100여 미터 올라가면 도솔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리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고령산앵무봉 등산로안내판’ 앞에 서서 등산로를 머릿속에 새겨둔다.

앵무봉 등산로 안내판

앵무봉 등산로 안내판

기자의 고령산 산행코스를 자세히 표기한 지도

기자의 고령산 산행 코스를 자세히 표기한 지도

앵무봉까지 1,130미터. 10분에 200미터 꼴로 슬슬 어슬렁거려도 1시간이면 된다. 등산길 중간에 도솔암으로 우회하여 30분을 추가하더라도 1시간 30분, 하산길을 1시간으로 잡아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현재시각 오후 3시, 따라서 하산시각은 5시 30분. 주먹구구 계산을 마치고 올려다보니 등산로 입구에 쇠사슬이 가로걸려 있다. 비포장도로가 뚫려 있긴 하되, 낯선 차량의 통행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사표시다. 손님 대접이 야박하다 싶긴 했으나 섭섭하진 않았다. 산책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등산길 아니겠는가. 가랑잎이 수북하게 쌓인 겨울산은 심신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욕심 내지 않고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목표가 가까워진다는 믿음도 기분을 고양시킨다.

딱 10분 동안만 그랬다. 180미터 지점부터 휘청대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구불구불 휘어져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비포장도로, 왼쪽은 산등성이로 곧장 뻗은 등산로. 갈림길 이정표 앞이었다.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 갑절의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도리 없이 가파른 길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빗변의 길이가 높이의 갑절이 되는 직각삼각형을 그려보면 경사각이 짐작될 것이다.

등산로 갈래 이정표가 고된 산행을 예고하는 듯하다.

등산로 갈래 이정표가 고된 산행을 예고하는 듯하다.

보광사 해탈문

보광사 해탈문

도솔천(兜率天)이란 수미산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있는,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란다. 수미산이란 세상의 중심이고, 1유순은 40리쯤 된단다. 그래서일까. 도솔암이란 이름을 들으면 산꼭대기를 쳐다보게 되고, 단출한 전각과 빈손 모아 쥔 스님을 떠올리게 된다.

고령산 도솔암도 영락없었다. 요사, 승당, 삼성각, 극락전. 달랑 네 채가 성냥갑처럼 이리저리 놓였는데, 그나마 삼성각 하나 빼놓곤 모두 천막을 뒤집어썼다. 오래 버텨온 끝에, 이제 그만 드러눕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입술을 떼기도 전에 청빈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도솔암의 유래가 적힌 낡은 안내판

도솔암의 유래가 적힌 낡은 안내판

도솔암 삼성각

도솔암 삼성각

삼성각의 여산신

삼성각의 여산신

낡은 안내판에 도솔암의 내력이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 있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에 보광사와 함께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무학대사와 함허선사가 정진한 곳이다. 특히 삼성각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여산신(女山神)을 모시고 있으므로, 전국에서 제일가는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왜 삼성각 하나만은 멀쩡한지 짐작할 만했다. 독성(獨聖)과 칠성(七星)은 탱화 속에, 여산신은 실물 크기 좌상으로 봉안되었다. 여산신이 머금은 미소가 예사롭지 않다. 영험을 빌려 전국에서 제일가는 기도도량이라 주장해도 될 듯싶다.

천막을 뒤집어쓴 극락전에는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 아미타좌상과 관세음보살좌상을 비롯한 후불탱화 등이 봉안돼있으되, 당장 중창불사에 나서지 않는다면 장래를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찍이 도선국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1,800 곳을 지정해 비보사찰을 창건했다던가. 산천의 기가 순하게 흐르도록 모자람을 채운다는, 비보(裨補)의 뜻이야 어찌되었든 문화재로서의 보존 대책은 시급해 보였다.

보광사 뒤편으로 앵무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보광사 뒤편으로 앵무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앵무봉 가는 길은 멀찌감치 물러앉은 해우소 뒤편으로 뚫려 있었다. 경사는 더욱 가팔라져서 45도의 비탈을 가로지르는 조도(鳥道)였다. 낙엽과 흙이 마구 내려 덮인 탓에 길인지 산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무둥치를 옮겨 짚거나 풀뿌리를 당겨 쥐면서 가까스로 등산로 제2쉼터에 다다르자, 쉬고 있던 산객 서넛이 인사말을 던져왔다.
“도솔암에서 오시는군요. 길이 험해서 산객들은 그쪽 길 잘 안 다니는데요.”

잘 다듬어진 등산로의 통나무계단과 도움줄은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100미터 위가 제3쉼터, 50미터 위가 헬기장, 50미터 위가 앵무봉 정상이었다. 4시 20분.

앵무봉 정상에 있는 표지석

앵무봉 정상에 있는 표지석

앵무봉에서 찍은 마장호수 모습

앵무봉에서 찍은 마장호수 모습

20여 미터 등성이 이쪽저쪽에 정상표지석, 정자, 이정표, 마장호수전망대가 늘어서 있었다. 정자 앞에서는 개명산의 군사시설 너머로 북한산이 우뚝했고, 전망대에서는 마장호수와 출렁다리가 한눈에 들었다. 안개만 아니라면 개성의 송악산도 보였으련만.

고령산은 파주시 광탄면과 양주시 장흥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여러 전적이나 지도마다 한자 와 해발고도가 제각각이고, 계명산이나 개명산으로 달리 표기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 산림청에서 고령산으로 통일해 달라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해발 622미터, 파주에서 감악산 다음으로 높은 앵무봉(鸚鵡峰)은 산의 모양이 꾀꼬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란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해설은 다르다. 앵무봉은 꾀꼬리봉 또는 꾀꼴봉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그중 꾀꼴봉은 고깔을 닮았다고 해서 불렸던 고깔봉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고깔봉이라 하다가 꾀깔봉을 거쳐 꾀꼴봉으로 변하여, 최종적으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앵무봉이나 앵봉이 된 사례가 많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령산 품안으로 들기 전, 영장리쯤에서 바라본 앵무봉은 영락없는 고깔 모양이었다.

보광사 아랫마을에서 바라 본 고깔 모양의 앵무봉

보광사 아랫마을에서 바라 본 고깔 모양의 앵무봉

4시 30분. 하산할 시각이었다. 갑자기, 도솔암 여산신의 유래가 궁금했다. 석조미륵보살상에 대한 소문도 확인하고 싶었다. 올라올 때 주지스님을 만나지 못했으나, 지금쯤은 돌아와 있으리라.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여산신에게 영혼이 사로잡힌 탓에 정신을 놓치고 말았다. 쉼터3에서 왼쪽으로 산비탈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던 것. 낙엽에 묻혔거나 드러난 맨땅은 길이라고도, 길이 아니라고도 단정할 수 없었다. 10분여를 헤매는 사이 100여 미터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숲속에 눈심지를 박고 살펴봐도 도솔암은 없었다. 경고판과 원형철조망이 앞을 턱 막아섰다. 군사시설 접근금지.

조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덮쳐왔다. 당황하지 말자. 급할수록 원위치로 돌아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쉼터3을 향해 열심히 산비탈을 기었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하며 온몸이 오싹했다. 맞은편으로 건너가려 해도 벼랑이 깊었다. 50미터쯤 더 기어오른 다음에야 골짜기를 건너지를 수 있었다. 등성이에는 제법 길 비슷한 게 보였다. 주르르 따라 내려갔다. 이번에도 원형철조망이 막아섰다. 지뢰 위험지역, 출입금지. 해는 꼴깍 넘어가고 땅거미가 기어들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두려움이 왈칵 달려들었다.

쉼터3으로 되짚어간 다음에야 등산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처음에 등성이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100미터 아래에서는 두 개로 새끼를 쳤던 것. 도솔암 가는 샛길은 그곳에서 100미터 더 내려간 쉼터2에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뒤였지만, 깨달음은 가슴에 새겨야 했다.

늦은 시각에 산행에 나서지 말 것. 중간에 함부로 계획을 바꾸지 말 것. 산은 나무처럼 위로 올라가면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뿌리처럼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