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다. 가까이에 답이 있다. 오르기에만 바빠서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야 발견하면 새로운 눈이 떠지기도 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고은, <그 꽃> 전문)에서처럼.
이처럼 자연도 아는 만큼 보인다. 그 출발은 이름 알기다.

시인 나태주는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나태주, <풀꽃2> 전문)이라고 읊었다. 나이 60을 넘기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운정신도시에 자리 잡은 운정호수공원의 풀꽃이나 나무들 또한 그런 존재다. 마음 채비에 따라서는 스승으로도 맞이할 수 있고, 삶의 지평이나 우주를 넓힐 수도 있다. 앞서의 1~2편에 이어서 몇 가지를 더 살펴보기로 한다. 살펴볼 것들은 그 밖에도 많지만, 식물 편은 이것으로 마친다. 다음에는 동물 편이 이어진다.

속 찬 것들은 조용하고 수굿하다 : 반송로

운정호수공원에는 두세 군데에 반송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말없이 좌우로 시립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눈인사로 맞이한다. 가히 반송로라 할 만하다.

운정호수공원에 줄지어 선 반송들

운정호수공원에 줄지어 선 반송들

반송은 조신하면서도 속이 차서 조경수로 많이 심는다.

반송은 조신하면서도 속이 차서 조경수로 많이 심는다.

반송은 수굿하면서 속이 차 있다. 그 모양을 본떠서 붙인 ‘반송(盤松)’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소나무 가운데 한 종류로, 분류상의 정식 명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금강송(‘춘향목’이 대표적), 반송, 곰솔(해송), 백송의 4종 외에 일본 특산의 금송도 일부 자생종으로 발견되고 있다.

소나무는 본래 극동 지역이 원산지인데 지금은 북반부 온대 지역 도처에서 자라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가로수로 심어져 있기도 해서, 순간적으로 우리나라에 온 듯한 생각이 들게 하는 곳도 있다. 기후 조건만 맞으면 잘 자라기 때문이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도 우리나라 소나무 한 그루가 잘 자라고 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방미 때 기념으로 심었다.

식물들의 눈물겨운 모성애 : 왕고들빼기와 참취

꽃을 피운 왕고들빼기

꽃을 피운 왕고들빼기

꽃대를 내밀고 있는 참취

꽃대를 내밀고 있는 참취

사진 속의 왕고들빼기를 자세히 보면, 꽃대 아래에 매달린 두 개의 잎과 지면 가까이에 있는 잎들(뜯어서 쌈 채소로 쓴다)의 모습이 다르다. 꽃대 아래에 매달린 잎들은 그 아래의 넓은 잎과는 달리 길고 날렵하다. 몸피를 단순화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온 힘을 모아 꽃대를 좀 더 높이 키워 올리려는 안간힘 탓이다.
오른쪽 사진 참취다. 흔히 보아 온, 지면에서 넓게 퍼진 잎을 가진 참취와는 전혀 다르다.쌈 채소로 먹는 넓은 잎과는 달리 무척 단출하다. 이 또한 왕고들빼기와 똑같이 꽃대를 높이 밀어 올리려 할 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가진 것 모두를 최소한으로 남기고 꽃대 쪽으로 집중한다.

이는 모두 씨를 최대한 멀리 보내기 위해서다. 즉 후손 번식을 위해 자식들에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주고 바치는 지극한 모성애다. 이처럼 자신의 몸피를 줄이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들은 일개 풀꽃으로만 여겨 왔던 것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읽힌다. 씨를 멀리 보내기 위해 꽃대를 최대한 높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어미의 잎들은 자진해서 초라해진다. 그 갸륵함은 눈물겹다. 속옷을 꿰매 입으며 자식들의 학비를 챙겼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과도 겹친다.

시인 김주대는 말했다. “내가 아는 만큼의 당신이 내 속에 격리된다. 나는 당신을 가둔 감옥이다”(시 <앎> 전문)라고 . 나는 내가 아는 만큼의 당신이기도 하다. 왕고들빼기도 취도, 모든 풀꽃과 세상도, 내가 아는 만큼 좁혀지거나 격리되어 그 진실들이 읽히고 해석된다.

이 왕고들빼기는 운정호수공원 도처에 있다, 낱개로 또는 무더기로. 취도 눈에 띈다. 가장 흔한 것은 조경용으로 심어 놓은 미역취지만 참취도 가끔 눈에 들어온다, 지나치지 않고 살펴보면.

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 : 박주가리

있어도 그냥 스쳐 보내는 것들은 많다. 알은체한 적 없는 잡초류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운정호수공원 이곳저곳에 주민등록도 없이 자리 잡고 있는 박주가리도 그중 하나다. 이 녀석은 두루두루 설움을 받는다. 우선 지명도가 낮다. 이름을 알고 나도 ‘-주가리’라는 낮잡아보는 말 때문에 천대를 받는다(‘박주가리’는 박 모양의 주둥이라는 뜻). 자르면 흰 유액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나오는 건 다 독성이 있다. 그래서 더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그 독성이 되레 해독제를 만드는 데 쓰인다. 강장·강정 효과도 있다. 그리고 열매에서는 명주실 같은 게 나오는데, 예전에는 쉬 상하는 솜 대신에 도장밥으로 쓰였고 바늘쌈지의 속 재료도 되었다. 연한 순은 나물로도 먹는다. 이처럼 과거에는 다용도로 쓰였고, 지금도 쓰일 수 있는 녀석이다.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 의미를 알면 그 존재 가치(쓰임)가 제값 매김 된다. 사람도 그렇다.

왕고들빼기와 박주가리가 뒤엉켜 있다.

왕고들빼기와 박주가리가 뒤엉켜 있다.

‘개똥이’가 오래 살고 사랑 받는다 : 쥐똥나무

거개가 알고 있는 쥐똥나무다. 흰 꽃이 뭉쳐 핀 뒤 보라색 열매를 맺고, 익으면 까만색으로 변한다. 겨울이 돼도 나무에 매달려 있다. 쥐똥나무란 이름은 겨울철에 매달려 있는 열매가 쥐똥 같다고 해서 붙여진 낮잡아 보는 말이다.

녀석은 개똥이 같은 존재다. 예전에 아이가 태어나면 무병장수를 빌면서 천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 그걸 아명(兒名)이라 하는데 개똥이, 삼돌이에서부터 도야지도 있었다. 고종과 황희의 아명이 각각 개똥이와 도야지였다.

쥐똥나무 꽃

쥐똥나무 꽃

까맣게 익은 쥐똥나무 열매(초겨울)

까맣게 익은 쥐똥나무 열매(초겨울)

쥐똥나무의 열매는 그 이름 덕택인지 대개 겨울까지도 손을 타지 않았다. 쥐똥나무 열매를 약재로 쓰기 위해서는 잘 말려야 하는데, 나무에 매달린 채 잘 말라서 그걸 따다가 그대로 약재로 썼다. 차로 끓여 마셔도 되는데, 피똥(혈변)이나 코피 등에 효과가 좋은 민간 약재였다. 혈당 조절용으로도 쓰인다.

쥐똥나무는 은근히 삼색조인데도(흰 꽃, 보라색 열매, 까만 약재) 그 이름 탓에 하대를 받아서 되레 생존에 크게 도움을 받은 나무라 할 수 있다. 낱개의 쥐똥나무는 연약해 보이지만 경쟁 식물이 없을 때는 손쉽게 군락을 이루어 세력을 넓히는 영악한 실속파이기도 하다. 운정호수공원 곳곳에서도 이 녀석들이 소리 소문 없이 세력을 확장 중이다. 하지만 밉진 않다, 몰려 피는 순백의 꽃과 이쁜 열매 모습들 덕분에.

이름이 닮으면 뭔가도 닮는다 : ‘환삼’과 ‘산삼’

환삼덩굴은 골칫덩이 중 하나다. 생태 교란 식물이기 때문이다. 들이나 길가에서 흔히 자라며, 다른 식물을 휘감아 말라 죽게 함으로써 서식지를 넓혀 간다. 이걸 제거하지 않으면, 기존 고유 식물들의 살 곳이 좁아지게 된다. 녀석의 줄기에는 잔가시가 있어서 피부에 닿으면 가렵고 따갑다. 게다가 잎들을 갉아먹는 잎벌레의 먹이 식물이다. 운정호수공원 곳곳에도 이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다. 파주시의 생태 교란종 제거 사업에 이 녀석은 빠져 있다. 더 시급한 외래종들이 있어서다. 1편에서 소개했던 단풍잎돼지풀이 그중 하나다.

환삼덩굴 잎

환삼덩굴 잎

미국에서 건너 온 생태 교란 외래종, 단풍잎돼지풀

미국에서 건너 온 생태 교란 외래종, 단풍잎돼지풀

산삼 싹이 나고 있다.

가을 산삼 모습

잡초 제거 작업과 무관하게 녀석의 쓸모 하나를 꼽으라면 심마니 입문 초짜들에게 산삼 잎 공부를 시킬 때다. 사진에서 보듯 두 녀석이 아주 닮았다. 처음 산삼을 캐러 산에 오르는 이라면 녀석의 잎을 따서 갖고 가면 크게 도움이 된다. 환삼과 산삼은 이름도 닮았다. 이름이 닮은 것들은 뭔가가 닮아도 닮았다. 악당과 악한이 한 글자 차이지만 나쁜 짓을 하는 데서는 닮아 있고, 정치꾼과 정치가도 큰소리 뻥뻥 치는 데서는 닮은 꼴이듯이.

삶의 지평은 아는 만큼 넓어진다. 그 지평이 삶에서 요긴한 윤활유 또는 은근한 도우미로 작용하는 일, 흔하다. 답답하거나 막혔을 때, 잠시 밖으로 나가 눈길을 자연으로 돌리면 그 답이 보일 때도 있다. 자연은 무언의 스승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까이에 머무는 흔한 존재들에 대해 제값 알아주기에는 무심하거나 인색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 것처럼. 짬 나는 대로 걷자. 더구나 공해를 피해 살기에 급급한 시대에 운정호수공원은 무공해 지역이다. 몸과 마음의 세탁장으로서는 그만이다. 게다가 무료다.

취재/사진 : 최종희 시민기자(email: jony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