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장기화로 변해버린 일상 때문에 불편함을 넘어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기자 역시 예외는 아니라 지인들과의 만남은 고사하고 늘 하던 운동이나 등산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집에서 하는 운동은 한계가 있었다. 바깥 구경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냥 집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산책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 외부인과의 접촉 없이 활보할 수 있으니 숨통이 트였다. 여름의 따가운 햇볕도 막아줄 정도로 하늘을 뒤덮은 잎이 무성한 나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예사로 보았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오면서 다양한 모양의 나뭇잎과 꽃에 앙증맞은 열매까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 함께 걸어도 좋고 홀로 걸어도 좋았다.

둑방 길에서 내려다본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그리고 공릉천

둑방 길에서 내려다본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그리고 공릉천

그런데 이것도 반복하다보니 지루함이 비집고 들어왔고 드넓은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그때 문득,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마라톤 코스였던 논둑길이 생각났다. 아파트 옆 초등학교를 돌아선 순간 탄성이 터졌다. 초록 물결의 논밭 풍경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더없이 예뻤다.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지만 시멘트로 잘 포장되어 있고, 시멘트 길 끝은 공릉천 변의 비포장길로 이어지는데 흙길도 걸을 수 있으니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동네 지인들과는 ‘뚝방 길’로 통한다. 둑방 길은 왼쪽으로 가면 금촌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고양시 관산동으로 이어지지만, 욕심 내지 않고 30분 거리에 있는 봉일천교까지 왕복하는 코스를 자주 걷곤 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마주하게 되는 북한산의 위용 또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풍광이다.

아파트를 나서면 곧바로 탁 트인 논둑길로 이어진다.

아파트를 나서면 곧바로 탁 트인 논둑길로 이어진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따라 돌아오는 길에는 웅장한 북한산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따라 돌아오는 길에는 웅장한 북한산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아파트 주변이나 돌자하고 남편하고 둑방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산이 아닌 평야에서 시야를 멀리 두고 둘러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걷는 시간대마다 다른 풍경으로 와 닿으니 시간만 나면 걷게 되요. 논마다 벼가 자라는 정도가 다르니 그걸 비교하며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남편하고 산책 삼아 나서는 길이 잦아지면서 부부 금실도 좋아졌다는 이영미 씨(파주시 조리읍). 이와 달리 김수경 씨(파주시 조리읍)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둑방 길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일도 애들도 남편도 모두 속상하게 해 마음이 너무 안 좋은 날 이어폰을 끼고 무작정 둑방 길로 향했어요. 그런데 정말 멋진 노을이 저를 반겨주는 거예요.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장마가 계속되던 지난 8월엔 날이 갠다는 일기 예보에 길을 나섰다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장대비가 쏟아지자 공릉천이 넘칠까 봐 무서웠는데, 걷다보니 비를 맞고 걷는 게 더 상쾌하고 좋더라고요. 둑방 길은 제 마음을 너무나 잘 위로해 주지요.”

둑방 길은 생각지도 못한 붉은 노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둑방 길은 생각지도 못한 붉은 노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둑방 길은 우리에게 매번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허허벌판이던 논에 모가 심겨지고 볼 때마다 한 뼘씩 두 뼘씩 자라 벼를 수확하는 풍경을 지켜볼 수 있으니 마냥 신기하다. 논둑길 사이로 심은 콩이나 들깨 들이 자라는 모습 또한 볼 만하다. 더욱이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의 변화무쌍함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갈대와 억새가 만들어 내는 은빛, 금빛 물결에 취해 황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갈대와 억새가 만들어 내는 은빛, 금빛 물결에 취해 황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20년 가까이 살면서 지척에 이런 멋진 곳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은 20년의 세월 동안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불만이 많았다, 발전이 없다고.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찾지 못했던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답답하다고, 너무 외졌다고 밖으로만 내돌며 정작 내 곁에 이토록 찬란한 아름다움이 벗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니! 요즘은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공릉천 변의 갈대와 억새가 은빛, 금빛 물결을 이루어 춤을 춰대니 내딛는 발걸음이 더없이 흥겹다.

잦아들 줄 모르는 코로나19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며 한숨만 내쉴 게 아니라 잠시 주위를 살펴보자.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줄 보물이 우리 주변에 제법 많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취재 : 전영숙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