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최씨의 소령원

왕실의 무덤은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친부모 무덤이며, 그 외는 묘이다.
당장 의문이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조선 왕실을 통틀어 최대의 경쟁자이자 불구대천지원수였던 두 사람의 후궁, 숙빈최씨의 무덤은 왜 소령원(昭寧園)이고 희빈장씨의 무덤은 왜 대빈묘(大嬪墓)인가.

소령원 제향

숙빈최씨는1676년(숙종 2)에 7세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고, 1693년(숙종 19)에 후궁이 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연잉군 금(昑)을 낳았으며, 1699년(숙종 25)에 숙빈에 책봉되었다. 1701년(숙종 27)에 희빈장씨가 인현왕후를 무고한 일을 고변하여 바로잡았으며, 1718년(숙종 44)에 창의궁 사저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왕족에게 규정된 예장(禮葬: 국장 다음 등급의 장례의전)을 명하고, 관재(棺材)와 제수를 넉넉히 보내 주었다.

연잉군은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문에 아버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특히 어머니의 장지를 정하는 일로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정했던 석관동의 묵장산은 “이미 왕릉터로 정해진 곳이니 쓰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다. 다음번은 “내관 장후재가 범연히 광주의 경내에서 묫자리를 얻었다면서 은연중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역 안의 청룡 터로 정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파직시키고 다른 산을 바꾸어 구하게 하라.”(숙종실록 44년 4월 20일)며 내관을 벌하기까지 했으며, 다시 찾아낸 양재동의 장지는 “선릉이 바라보이니 다른 산으로 바꿔서 택점하는 게 낫겠다.”며 불허했다(숙종실록 44년 4월 29일).

소령원도

보물 제1535호 숙빈최씨 소령원도

소령원화소정계도

보물 소령원배치도

결국 연잉군 자신이 나서서 직접 찾아낸 장지가 팔일봉 기슭의 소령원(昭寧園)이다. 당시에 그려진 <묘소도형여산론>, <소령원도>, <소령원화소정계도>, <소령원배치도> 4종은 보물 제15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령원 향나무

영조의 시묘살이 터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1724년) 영조는 제일 먼저 어머니 숙빈최씨의 추숭(追崇)을 서둘렀다. 경복궁 북쪽 산기슭(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숙빈의 사당 숙빈묘(淑嬪廟)를 세웠다. 또한 팔일봉 기슭의 숙빈최씨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귀부의 길이 468cm, 높이 104cm의 거대한 규모였다.

소령원 신도비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거북이 받치고 있는 신도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숙빈최씨의 가계와 생애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빈께서는 그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몸가짐은 현숙하고 삼가셨을 뿐 아니라 진중하고 화목하시며 온순하고 화순하시었다. ……더욱이 남의 장단점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어쩌다 이런 일을 저지르면 곧 꾸짖으셨다.” 등으로 칭송하고 있다.

칠궁

육상궁

연호궁

1734년(영조 10년) 2월 18일에는 외할아버지 최효원을 영의정으로, 외할머니 남양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그해 6월 25일에는 숙빈최씨의 사당과 묘소의 호를 높여 묘호(廟號)를 ‘육상묘(毓祥廟)’라 하고, 묘호(墓號)는 ‘소령묘(昭寧墓)’라 했다. 1753년(영조 29년) 6월 25일, 영조는 숙빈최씨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린 다음, 묘(廟)는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하는 ‘궁원제도’를 제정했다. 이에 따라 소령묘는 ‘소령원’으로, 육상묘는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 육상궁에는 숙빈최씨의 사당만 있었으나, 1908년에 흩어져 있던 사친묘(임금의 생모가 된 빈의 사당)를 모아서 육궁(六宮)이 되었고, 1929년 고종의 후궁 엄씨를 모시면서 칠궁(七宮)이 되었다.



궁녀로 입궐하여 왕비까지 오른 희빈장씨의 생애를 돌아보노라면 숨이 가쁘다.
1680년(숙종 6년) 무렵 궁궐의 나인 장씨가 숙종의 은총을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 명성왕후가 사가로 쫓아내었다.
1683년(숙종 9년 12월 5일) 왕대비 명성왕후 김씨가 훙서했다.
1686년(숙종 12년 12월 10일) 장씨를 숙원으로 책봉했다.
1688년(숙종 14년 10월 27일) 왕자 윤(昀)을 낳은 장씨를 소의로 책봉했다.
1689년(숙종 15년 1월 15일)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했다.
1690년(숙종 16년 10월 22일)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1694년(숙종 20년 4월 12일)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세자의 조석 문안은 폐하지 않았다.
1701년(숙종 27년 10월 8일) 승정원에 하교하여 장씨를 자진케 했다.
1722년(경종 2년 10월 10일) 임금의 생모 장씨를 추존,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라 하였다.

둥근 기둥을 쓴 대빈궁

장례는 생시의 후궁 지위에 따라 예장(禮葬)으로 거행되었으나, 죄인으로 죽었다는 점에서 희빈장씨보다는 세자(경종)를 위한 배려였다. 숙종도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단지 제수(祭需)만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희빈의 묘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세자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장지 선정에 4개월이나 걸렸다. 이후 숙종은 세자에게 상주의 예를 다하라고 명하였고, 희빈장씨를 위해 세자의 상복을 3년으로 정하였다.

경종 역시 왕위에 오른 뒤 어머니의 복권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희빈장씨에게 특별한 명호(名號)를 내려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사당을 세웠고, 1722년(경종 2) 10월 10일에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숭했다. 그러나 더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경종 자신이 폐비 장희빈의 소생이라는 이유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한다는 입지 때문에 처신이 어려운데다, 병약하기까지 하여 재위 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세자 부부의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는 1870년에 세워졌으며, 왕의 사친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는 1753년에 세워졌다. 경종의 생전(1688~1724)에는 왕의 사친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 자체가 없었으므로, 희빈장씨의 사당은 대빈궁(大嬪宮)이었고, 묘소는 대빈묘(大嬪墓)였다.
희빈장씨의 대빈궁은 칠궁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다른 궁과 달리 둥근 기둥을 써서 신분이 정식 왕비까지 올랐음을 알리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다.

*취재: 파주알리미 강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