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가 추진하는 ‘용주골 창조문화밸리 프로젝트’는 미군 철수 이후 침체를 겪어온 용주골 일대를 새로운 문화명소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야심찬 기획이다. 그중 ‘연풍리 공예창작거리 조성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전통공예체험, 칠보공예, 나뭇가지공예 등 7개 공방이 3월 중에 문을 연다고 한다.
명학산(鳴鶴山, 220m)은 용주골을 품어 안은 어미두루미 같은 산이다. 가파르지도 험하지도 않아 자녀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없으니, 공예창작거리와 함께 더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명학산 등산 안내판

명학산 등산 안내판

등산로는 용주골과 안용주골의 경계에 자리 잡은 연풍초등학교 후문에서 시작된다. 오른쪽 등성이로 올라갔다가 안용주골로 내려오는 1코스가 있고, 안용주골로 직진했다가 오른쪽 등성이로 내려오는 2코스가 있다. 2~3시간이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 어느 쪽도 괜찮지만, 계단 오르기가 부담스럽다면 2코스를 택하는 게 편하다.

명학산 산림공원 안내판 옆 등성이로 가는 길

명학산 산림공원 안내판 옆 등성이로 가는 길

유격 훈련장의 그네넘기 코스

유격 훈련장의 그네넘기 코스

‘명학산 산림공원’ 안내판 옆 등성이로 접어들면 완만한 언덕이 이어지다가 차량 통행이 가능한 비포장도로와 만난다. 그곳부터 유격훈련장이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추억일 수도 있지만, 군복무 당시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장애물들이 좌우로 줄줄이 늘어섰다. 줄타고 오르기, 그물망 오르기, 철교 건너기, 인공암벽 오르기, 발들어 봉 넘기, 그네 넘기 등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눈요기란 말이 있고, 아이쇼핑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눈으로 하는 유격훈련도 있는 법이다. 하나하나 눈길로 짚어가며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으로 가면 ‘미사일 정상’이고 직진하면 ‘명학산 정상’이란다. 미사일 정상이란 게 무언지, 고작 200m 때문에 안 가볼 수는 없다. 비포장도로는 그리로 뻗어 가고, 정상으로 향하는 건 오솔길이니 더 궁금해진다.
막다른 길 언덕에 다다라도 여전히 시야가 막힌 숲속이다. 그곳이 ‘미사일 정상’이라는 표시인 듯, 모형 미사일의 잔해가 이리저리 나뒹군다. 되짚어 나와 정상으로 향한 오솔길을 오른다. 길이 좁아진 만큼 솔숲은 더 깊어지고, 솔잎 향기는 짙어진다.

명학산 정상 돌탑 앞에 있는 오래된 동판이 산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명학산 정상 돌탑 앞에 있는 오래된 동판이 산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오래된 미사일 잔해가 있는 정상

오래된 미사일 잔해가 있는 정상

구불구불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뻗어간 오솔길 끝에는 제법 긴 나무계단이 있다. 단숨에 올라가면, 하늘이 어깨 위로 덜컥 내려앉는다. 다시 널따란 비포장도로로 나선 것이다. 안내판에 적힌 대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가 왼쪽 비탈로 들어서면 저만치 앞쪽에 정상 전망대가 보인다. 예전에 군인들이 지키던 2층짜리 초소인데, 건물도 계단도 멀쩡하다.
숲 그늘에서 벗어난 덕분에 키 작은 나무와 풀포기들이 무성하다. 몸피는 왜소해도 그것들이 계절 앞에 정직하다. 봄에는 산벚꽃과 진달래가, 여름에는 머루덩굴과 청미래덩굴이, 가을에는 산국과 억새가, 겨울에는 빨간 청미래 열매와 누리장나무 까만 열매가 제자리를 지킨다.
정상의 돌탑 앞에는 오래된 동판이 박혀 있다. 명학산 177m. 당장 네이버지도를 확인하니 220m가 맞다. 진위 따위야 어찌 되었든, 설명은 이어진다. 파평산 남서맥 자운산을 거쳐 내려온 지맥인 이 산은 학이 깃들여 울었다 하여 이름하였으며 절육신 황보인 묘 설치 후 애국충절 6위를 모신 월계단이 있어 월계산(月桂山)이라고도 하였다.

월계단에 잠들어 있는 충신 황보인의 묘

월계단에 잠들어 있는 충신 황보인의 묘

황보인은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된 후 10년 동안 절제사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하는 등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세종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지키다가 계유정난 때 살해되었다. 관리가 당대의 권력에 충성하느냐, 국가에 충성하느냐를 선택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어려운 문제다. 300년이나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신원이 이루어져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받고, 김종서를 비롯한 절육신 여섯과 함께 월계단에 배향되었다.
계단을 감아 오르는 머루덩굴에도 머루가 열린다. 조심스럽게 전망대 옥탑으로 올라서면 가슴이 탁 터진다. 북으로는 개성 송악산이, 남으로는 서울 삼각산이 한눈에 잡힌다. 언덕과 평야로 이루어졌기에 파평(坡平)으로 불리다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출신지라서 파주로 승격되었다는 역사에 걸맞게, 올망졸망한 산줄기와 언뜻언뜻 본색을 내비치는 강줄기가 정답다 못해 아슴아슴 안타깝다.
되짚어서 곧장 내려오면 비포장도로 옆 언덕이 헬기장이다. 거기서도 시야는 넓게 트여서 파주의 산야가 환히 드러난다. 주변의 풍광이 예쁘다. 한여름이면 길섶에서 오디와 개암이 익어가고, 헬기장엔 좁쌀만 한 분홍꽃이 피는 백령풀이 보료처럼 깔린다. 가을이면 아람이 버는 밤송이, 털모자를 벗어던진 도토리, 빨갛게 익은 청미래 열매가 잔치마당을 벌인다.
어릴 때 먹었던 망개떡이 생각이 절로 난다. 찹쌀가루 반죽에 계핏가루, 설탕, 꿀을 넣어 만든 거피팥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어 청미래덩굴 잎사귀를 앞뒤로 붙여 쪄낸 떡이다. 청미래덩굴잎의 향이 떡에 배어들면서 상큼하고, 여름에도 잘 상하지 않는다.
무지개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가에도 청미래덩굴이 즐비하다. 열매가 달려 있는지, 빈 덩굴뿐인지 살펴가다 보면 운동기구와 의자가 놓인 쉼터가 나온다. 산객들에게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 이리저리 몸을 꼬고 뒤트는 나무들의 묘기자랑이 일품이다. 길은 계속 이어져서 네갈래길에 닿는다. 비포장도로는 오른쪽 향양리 쪽으로 구부러져 내려간다.

익은 청미래

익은 청미래

누리장나무

누리장나무

무지개산 정상

무지개산 정상

무지개산 정상으로 치닫는 나무계단 200m가 벌떡 일어선다.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길기도 해서 끝이 안 보인다. 처음부터 계단 오르는 게 부담스러우면 반대로 순환하는 2코스를 선택하는 게 편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직 늦지는 않았다. 안용주골약수터로 질러가는 왼쪽 지름길을 선택할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진감래라고 하지 않았던가. 땀 흘려 계단을 밟으면 수고의 대가가 기다린다. 숨통이 뻥 뚫리는 전망대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산야를 한껏 눈에 담고 나서 좁다란 등성이 길을 내려간다. 꼬불꼬불 멋스럽게 휘어진 소나무 발굽 아래로 날을 세운 돌부리가 날카롭다. 한눈팔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길은 다시 삼거리에서 막히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파주6리, 왼쪽으로 내려가면 안용주골약수터다. 처음에는 안용주라는 사람과 관계되는 약수터인 줄 알았다. 용주골 안쪽 동네라는 뜻을 헤아린 건 네다섯 번쯤 찾은 다음이니, 참으로 눈치 없는 인사다.

약수는 넉넉하게 솟는데, 수질검사표는 매번 ‘음용가’ ‘음용불가’로 들쑥날쑥 한다. 약수터를 나서면 맞은편 산기슭에 경기도 기념물 제106호 ‘윤곤(尹坤)선생 묘’가 건너다보인다. 조선조 정종 2년, 이방원이 동복형 이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되었단다. 논다랑이 사이로 마을에 들어서면 윤곤선생을 기리는 용지병사와 신도비, 정려비를 비롯한 수십 개의 사적비들이 재실의 솟을대문과 함께 안용주골을 압도한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