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는 사연 많은 여인들의 묘가 적지 않다. 기생 출신으로서 정실 처첩도 아님에도 후손들이 양반 사대부가의 묘지에 정식으로 모신 최초의 사례인 홍랑, 관비 출신의 생모 휘하에서 자라나 종1품 정경부인으로까지 올라 문정왕후의 비호를 배경으로 남편인 윤원형보다 더 실세를 자랑하던 정난정, 자매가 연속하여 왕비의 반열에 오른 한명회의 두 딸. 그리고 5분만 더 버텼더라면 출산했을 산모가 안타깝게도 절명하여 모자의 미라가 최초로 공개되었던 이름 미상의 파평 윤씨 여성 등이 그들이다.

묘는 파주에 없지만, 파평 윤씨 출신으로 은근히 사가들의 입길에 오른 이들도 꽤 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서부터, 수양대군 시절 그에게 베갯머리송사(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살거리며 청하는 일)로 적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희왕후 윤씨 역시 파평 윤 씨 출신이다. 정난정의 뒷배였던 문정왕후(윤원형의 누님)도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이었다.

이들의 묘와 사연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기생 홍랑과 북도평사 최경창의 사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 오씨장전사본(吳氏藏傳寫本)

이 시조의 작자는 기생 홍랑이다. 고죽 최경창(1539~1583)이 북평사로 제수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가다가 자신의 시를 읊는 관기 홍랑을 만나면서, 둘은 꿈 같은 시간을 보냈으나 최경창의 관직이 바뀌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홍랑은 함경도 주민이 넘을 수 없는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자 7주야를 걸어 한양까지 와서 극진히 간호했다. 국상 중에 함경도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고 조정에 알려져 최경창은 파직되고 홍랑은 홍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고죽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준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서로를 애처로이 바라보다 난을 준다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하늘 끝 언제 또 오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옛 함관령 그 노래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은 비구름 속 어두운 청산
                                             -贈洪娘詩(증홍랑시 ; 홍랑에게 주는 시)

그 뒤 최경창이 사망하자(45세) 홍랑은 스스로 용모를 훼손하고 3년간 묘소 근처에서 지내며 시묘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글들을 짊어지고 피란길을 전전하다가, 전후 그의 글을 해주 최 씨가에 전하고 최경창의 무덤 앞에서 숨졌다.

이러한 홍랑의 순정에 후손들도 감동했는지, 그녀를 최경창의 묘 아래에 묻었다. 아름다운 로맨스에 어울리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조선 중기, 당시에는 정실이 아니고는 사대부가의 문중 묘에 모셔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홍랑과 최경창의 묘는 교하면 청석초교 길 건너 청석마을 뒤 산자락에 있는데 길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주소로 찾아가려면 교하읍 다율동 519-7. 홍랑의 묘비에는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 적혀 있다.
묘역에는 그녀의 시를 새긴 홍랑가비(洪娘歌碑)라는 시비도 있어서, 그녀를 두고 두고 기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여전하다.

홍랑의 묘 뒤편으로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홍랑의 묘 뒤편으로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홍랑가비

홍랑가비

조선시대 치맛바람의 원조(?), 정난정

조선 중기(인종~명종)에 일개 처첩으로서 정난정만큼 거센 치맛바람을 일으킨 이도 드물다. 그녀를 주역의 하나로 삼은 사극들만도 여러 개이고(<여인천하>, <옥중화>, <조선생존기> 등), 그 중 하나가 ‘여인천하’일 정도로.

정난정의 아비는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었지만 생모는 관비로 천인이었다.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자 작심하고 기생이 되어 중종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악착같이 노력하여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무시로 궁궐을 출입하게 되고 끝내는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嫡妻)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섭정하고 있을 때, 1553년(명종 8)에는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이르렀다.

정난정은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됨으로써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을사사화에도 관여하였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정난정의 자식과 혼사를 맺으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하였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사림의 탄핵을 받아 결국은 자결하고 말았다. 윤원형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 유배지에서 자결했다. 그처럼 당대의 걸물이었던 그녀를 ‘조선시대 치맛바람의 원조’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정난정은 윤원형과 함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 있다. 성재암 쪽으로 가다 보면 묘역 안내판이 있고 거기서 22번으로 표기된 곳이 그것인데 합장묘는 아니다. 정난정의 묘비는 비개석(碑蓋石)이 없는 갈(碣)*이다. 사림의 탄핵을 받아 천민으로 강등돼서다.
(* 갈 : 비개석(碑蓋石)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

윤원형의 묘(왼쪽 큰 묘)와 정난정의 묘(오른쪽 작은 묘)

윤원형의 묘(왼쪽 큰 묘)와 정난정의 묘(오른쪽 작은 묘)

천민으로 강등돼 정난정의 묘비에는 비개석(碑蓋石)이 없다.

천민으로 강등돼 정난정의 묘비에는 비개석(碑蓋石)이 없다.

가장 높은 자리 올랐으나 단명한 한명회의 두 딸,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에 위치하는 삼릉은 공릉, 순릉, 영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인데, 각각 장순왕후[추존], 공혜왕후, 진종과 효순왕후[추존]을 모신 능이다. 이 중 정조가 효장세자와 그 세자빈을 추존한 것이 진종과 효순왕후인데,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형이지만 10살에 죽었고,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로 편입되어서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에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와 세자빈을 왕[진종]과 왕비로 추존하여 기렸다. (‘추존(追尊)’이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을 이르는 말).

파주삼릉 배치도

파주삼릉 배치도

공릉의 주인공 장순왕후는 세조의 아들, 예종이 왕세자이던 시절에 왕세자빈이었는데, 첫 아이를 낳고 나서 산후통으로 절명했다. 당시 나이 16세.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후로 추존되었다. 순릉은 성종 비 공혜왕후의 무덤인데, 아들 없이 18세에 요절했다. 이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한명회의 셋째딸, 넷째딸이다.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예종과 성종은 삼촌 조카 사이. 따라서 자매간임에도 막내딸은 언니의 조카 며느리 격이었다.
이 두 자매의 묘는 왕비의 묘임에도 왕과 합장되지 못하고 홀로 묻힌 단릉이다. 요절하는 바람에 계비들이 왕을 오래 모셨기 때문이다. 요절도 서러울 터인데, 죽어서도 남편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서러움이 적지 않을 능이다. 배치도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좌우로 외롭게 모셔져 있다.

공릉(장순왕후) 능침.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이라서 석물 일부가 빠져 있다.

공릉(장순왕후) 능침.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이라서 석물 일부가 빠져 있다.

5분만 더 버텼더라면... 최초의 모자(母子) 미라

2002년 9월 6일 경기 파주시 교하리 야산(장명산)에서 파평 윤씨 문중 묘소의 이장 작업 중 발굴된 묘 하나가 사가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1566년 윤 10월에 묻힌 여인이었는데, 완벽한 형태와 화려한 색상의 염습의(殮襲衣.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입히고 묶는 옷)는 물론이고, 시신도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미라 상태의 시신으로서 가장 완벽했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뱃속에는 태아가 있었다. 그것도 태아의 머리가 모체의 질(膣)의 전장을 통과하여 외음부 가까이까지 도달하여, 산모가 5분만 더 살았다면 아기를 낳았을지 모르는 그런 상태였다.

모자(母子) 미라로는 최초의 발견이기도 한 이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의 회곽묘(석회와 가는 모래(細沙), 황토를 3:1:1로 섞어 회다짐을 하여 무덤 구덩이와 곽의 6면에 싸바르는 무덤 조성 양식)의 성능이 간접적으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현재 이 묘는 이장되어 표지석만 서 있다.

장명산에서 미라 상태의 시신 발굴 직후 모습

장명산에서 미라 상태의 시신 발굴 직후 모습

미라 묘지에 남아 있는 표지석

미라 묘지에 남아 있는 표지석

파주에 묻히지는 않았으나 파평 윤씨의 후예로 조선조 역사에서 거명되는 인물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있다. 현재 고양시 서삼릉 내 회묘(懷墓)에 묻혀 있는데 비공개 능역이다. 이 윤씨는 위에 언급한 공혜왕후(성종 비. 한명회의 넷째 딸)가 요절하자 그 계비로 책봉되었는데 말썽을 피워 폐비되고, 아들에 의해 복위되었다가, 다시 폐서인이 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그래서 무덤 명칭이 ‘묘’다.

이조시대의 왕족 무덤은 최종 신분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묘(왕족과 폐위된 왕/왕비) ⇨원[園](왕의 생모/생부, 세자/세자빈) ⇨능[陵](왕과 왕비)의 순서다. 폐위된 연산군/광해군의 무덤은 그래서 ‘묘’이고 폐비 윤씨도 마찬가지. 사도세자가 폐세자 직후에는 수은묘, 정조 즉위 후 세자로 복위되어서는 영우원, 장조로 추존된 후에는 융릉으로 격상된 것이 그 좋은 예다.

세종의 며느리로서, 수양대군 시절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들 예종이 즉위 14달 만에 죽자 13살의 성종을 올려 8년간 수렴청정했던 정희왕후 윤씨 역시 파평 윤씨다. 연산군과 중종이 그녀의 증손자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와 함께 경기도 광릉에 잠들어 있다.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세 번째의 성종 비가 된 정현왕후. 그리고 각각 중종의 제1계비와 제2계비인 장경왕후와, 정난정의 뒷배였던 문정왕후도 파평 윤씨다. 즉, 성종~중종의 6왕비 중 네 사람이 파평 윤씨였다. 이들은 각각 삼성동 선릉[정현왕후], 고양 서삼릉의 희릉[장경왕후 단릉], 공릉동의 태릉[문정왕후 단릉]에 묻혀 있다. 문정왕후의 태릉은 왕비의 단릉인데도 왕에 못지않게 웅장하여, 그녀의 살아생전 권력과 위엄을 짐작할 수 있다.

무덤과 묘비는 죽은 자의 축소판 생애기이기도 하다. 왕의 무덤인 능마다 비각이라 하여 그의 업적과 일생을 길게 적은 커다란 비석을 보존하고 있지만, 그것까지 챙겨 훑는 후대인들은 아주 드물다.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칼 마르크스의 짧은 묘비명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는 전 세계에 퍼졌다. 짧고 굵은 생각은 어떻게든 번진다. 비록 조국도 아닌 타국인 영국 땅에 묻힌 몸인데도. 정작 사람이 남겨야 할 것은 무덤이 아니라 말이다.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jony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