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 묻히지는 않았으나 파평 윤씨의 후예로 조선조 역사에서 거명되는 인물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있다. 현재 고양시 서삼릉 내 회묘(懷墓)에 묻혀 있는데 비공개 능역이다. 이 윤씨는 위에 언급한 공혜왕후(성종 비. 한명회의 넷째 딸)가 요절하자 그 계비로 책봉되었는데 말썽을 피워 폐비되고, 아들에 의해 복위되었다가, 다시 폐서인이 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그래서 무덤 명칭이 ‘묘’다.
이조시대의 왕족 무덤은 최종 신분에 따라 달리 부르는데 묘(왕족과 폐위된 왕/왕비) ⇨원[園](왕의 생모/생부, 세자/세자빈) ⇨능[陵](왕과 왕비)의 순서다. 폐위된 연산군/광해군의 무덤은 그래서 ‘묘’이고 폐비 윤씨도 마찬가지. 사도세자가 폐세자 직후에는 수은묘, 정조 즉위 후 세자로 복위되어서는 영우원, 장조로 추존된 후에는 융릉으로 격상된 것이 그 좋은 예다.
세종의 며느리로서, 수양대군 시절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들 예종이 즉위 14달 만에 죽자 13살의 성종을 올려 8년간 수렴청정했던 정희왕후 윤씨 역시 파평 윤씨다. 연산군과 중종이 그녀의 증손자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와 함께 경기도 광릉에 잠들어 있다.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세 번째의 성종 비가 된 정현왕후. 그리고 각각 중종의 제1계비와 제2계비인 장경왕후와, 정난정의 뒷배였던 문정왕후도 파평 윤씨다. 즉, 성종~중종의 6왕비 중 네 사람이 파평 윤씨였다. 이들은 각각 삼성동 선릉[정현왕후], 고양 서삼릉의 희릉[장경왕후 단릉], 공릉동의 태릉[문정왕후 단릉]에 묻혀 있다. 문정왕후의 태릉은 왕비의 단릉인데도 왕에 못지않게 웅장하여, 그녀의 살아생전 권력과 위엄을 짐작할 수 있다.
무덤과 묘비는 죽은 자의 축소판 생애기이기도 하다. 왕의 무덤인 능마다 비각이라 하여 그의 업적과 일생을 길게 적은 커다란 비석을 보존하고 있지만, 그것까지 챙겨 훑는 후대인들은 아주 드물다.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칼 마르크스의 짧은 묘비명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는 전 세계에 퍼졌다. 짧고 굵은 생각은 어떻게든 번진다. 비록 조국도 아닌 타국인 영국 땅에 묻힌 몸인데도. 정작 사람이 남겨야 할 것은 무덤이 아니라 말이다.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jony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