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와 3.1운동, 그리고 그 기념비들 이야기


파주는 지정학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데다 북쪽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서울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3.1운동 당시에도 탑골공원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즉각 전파되었고 이는 파주의 3.1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

파주의 3.1운동은 다른 지역들의 그것들과 달리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적지 않은 희생자들도 발생했고, 22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특히 당시에 희생되신 열 분의 영혼을 보듬어 드리기 위해서라도.

 

파주 3.1운동의 전개 과정

파주 지역의 3·1운동은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동)의 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에서의 시위가 그 시작인데, 3월 26일에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 뒤 3월 27일 청석면 시위로 이어졌다. 3월 28일에는 파주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꼽히는 광탄면 발랑리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약 2,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날은 봉일천 장날이기도 했다.

시위대는 봉일천 장으로 향했는데, 시위 군중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 시위는 심상각의 기획하에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이 주축인 19명에 의해 주도됐다. 이날도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광탄면민인 박원선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시위는 단순한 만세 시위가 아니라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무단통치 기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거센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파주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 격렬했는데, 특별한 결사조직이 없이 군민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 시위를 발생일 기준으로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의 첫 시위와 그 이후

1919년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읍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학생 1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했다.

주동 인물은 구세군의 임명애(林明愛)로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그에 따라 학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3월 25일에는 김수덕(金守德) 김선명(金善明) 등이 임명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격문을 인쇄했다. 원고는 구세군의 염규호(廉圭浩)가 썼는데 “오는 28일 동리(洞里) 산으로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하겠다”는 다소  거친 내용이었다.

격문은 약 60장을 인쇄해서 와동리와 당하리 등지에 배포했다.

3월 26일에는 염규호, 김창실, 김수덕 등이 인근에서 모여든 군중 약 700명을 인솔하고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면사무소 유리창을 깨트리고 면서기 2명에게 휴무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파주 3.1운동의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시위 행렬이 주재소로 향하자 경비하던 헌병이 발포해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崔鴻柱)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에 놀란 군중은 황급히 흩어졌다.

이 시위를 주동했던 임명애, 염규호, 김창실, 김수덕 등은 모두 검거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월 ~ 1년의 징역을 언도 받게 된다. 이 와석면의 시위는 종교인[구세군]인 임명애, 염규호 등이 주동해 이루어졌는데, 군중들이 식민지 지배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는 적극적 형태를 띤 시위였다.

다음날인 3월 27일 청석면의 심학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이 정오가 지나자 면사무소를 향해 시위 행진을 벌였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섰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뒤를 따랐다. 시위 대열은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뜰에 모여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시위대가 던진 돌로 면사무소 건물의 유리창과 기와 일부도 파손됐다. 결국 면장 유병익(柳炳益)은 만세를 같이 부르고 군중의 자진 해산을 촉구했으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교하리 주재소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교하리에서 헌병이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들은 일단 해산했다.

하지만 그날 밤 여러 곳에서 봉화와 만세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청석면 시위는 학생들이 향도가 되어 앞장서는 3.1 운동 초기의 전형적 양상이었지만, 면사무소, 주재소를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다소 거센 적극성도 가미돼 있다.


봉일천 공릉 장날 최대 규모의 시위 전개

교하 청석면 시위가 벌어지던 3월 27일, 광탄면 발랑리에서도 동네 사람 수백 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다음날인 28일까지도 면사무소 앞에서의 시위는 계속됐는데 이후 시위 군중들은 조리면 봉일천리까지 행진해 봉일천 장날(공릉장)에 모인 군중들과 합세하여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봉일천 장날의 만세 사건은 파주 3.1 운동에서 가장 대규모로 전개된 사건이자 가장 치열한 시위이기도 했다.

봉일천 장날의 만세 사건은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金雄權) 권중환(權重煥) 심의봉(沈宜鳳) 이근영(李根永) 이종구(李宗九) 유영(柳瑛) 등이 주동이 돼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대표 19명이 모의, 군내는 물론 고양군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의 시위를 3월 28일 전개하기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사 당일 광탄면 등지에서 2천여 명의 군중이 봉일천 시장으로 몰려와 그곳에 있던 1천여 명의 군중과 합세해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도 희생자들이 나왔다. 시위 군중들이 봉일천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자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朴元善)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뒤 이날 시위 책임을 물어 발랑리 주민 조무쇠(曺茂釗) 이인옥(李仁玉) 남동민(南東敏) 정천화(鄭天和) 정갑석(鄭甲石) 이기하(李起河) 정봉화(鄭奉和) 강흥문(康興文) 등 8명이 체포돼 각각 징역 8월의 형을 받았다.

이처럼 파주에서 벌어진 3.1운동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그 시발은 학생과 지식인이 선도했지만 그 뒤 전면으로 부상한 주축 세력은 농민 등과 같은 기층세력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다음은 그 투쟁이 매 시위 때마다 면사무소나 헌병주재소를 공격한 데서 알 수 있듯, 처음에는 잠시 평화적 형태였으나 그 뒤로는 다소 과격할 정도로 급진전했다. 마지막으로는 장날 등 인파가 몰리는 장소를 선택하는 조직적 시위를 했고 인근의 타 지역민들도 원정 시위에 합세하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파주의 3.1운동은 전국적인 양상과 맞물려 진행됐지만 다른 지방에 못지않게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많은 피검자와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당시 인명이 확인된 피검자 수는 21명, 사망자 수는 10명에 이르며 이들의 우국충정과 애국애족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파주 내의 3.1운동 기념비

파주에는 이러한 3.1운동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세 군데에 기념비가 조성돼 있다.

첫째는 파주 지역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1919년 3월 10일의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의 시위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다. 2019년 3월 1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교하초등학교 교정에 ‘파주 교하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파주 교하초교에 세워진 파주교하 3.1독립운동 기념비. 비석 기단부의 세 개의 삼각형은 ‘3’, 수직으로 올라간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은 ‘1’을 상징한다>


그다음으로는 대규모 농민 조직이 봉기한 3.1운동의 발상지인 광탄면의 3.1운동 발상비가 있다. 3.1운동 발상비(發祥碑)는 현재 광탄면사무소 내에 있는데 197831일 광탄면민 일동으로 광탄중종고 교정 내에 세운 것을 광탄면사무소 내로 옮겼다. 이 발상비는 2단으로 된 비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 머리를 올렸는데 전면에는 ‘3.1운동 발상비라 새겼고 뒷면에는 광탄면민 일동으로 된 추모의 글이 담겨있다.



<광탄면사무소의  3.1운동  발상비>
<면민일동으로 된 추도문>

파주 최대규모의 3.1 만세시위가 펼쳐졌던 조리읍 봉일천리에도 1978년 3월 1일 건립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3단으로 된 대석 위에 비신을 올렸으며, 전면에 ‘파주 3.1운동 기념비’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음기로 비문의 글이 적혀 있다. 기념비의 바로 옆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파주 3.1운동 기념비 건립취지문’을 적은 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기념비문에는 파주 3.1운동을 주도한 심상각 선생을 비롯한 19인의 명단과 당시 만세를 부르다 희생된 김남산(金南山)선생 등 8인의 명단, 그리고 옥고를 당한 22명의 명단 등 파주지역 3.1운동 관련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어서, 3.1운동 관련 기록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봉일천리  파주3.1운동 기념비 >


3.1절은 해마다 돌아온다. 요즘에는 3.1절에 국기조차 달지 않는 가정이 아주 많다는 방송 보도까지 나온다. 우리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맞이하게 된 것은 선열들이 흘린 피의 공과 땀의 결실 덕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파주 곳곳에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오가는 길에 기념비 하나라도 대하게 되면 다가가 한 번쯤 정성껏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선조들에게 보답이 되지 않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


[취재] 파주알리미 최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