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산은 낮은 동산이지만 평지에 우뚝 솟아서 시야에 걸림이 없다. 동으로 감악산, 남으로 북한산, 서로 마니산, 북으로 송악산까지 사방이 탁 트였다. 코앞에는 짙푸른 임진강이 굽이치고, 발아래는 한반도의 대동맥 1번국도가 달려간다. 봉황이 깃들였던 성스러운 산이라는 전설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최적의 입지를 갖춘 요새인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라산봉수에 대응하는 대산봉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권율 장군이 진을 옮겨와 한양 탈환의 교두보로 삼았다. 6.25 한국전쟁 때는 초기전투, 1.4후퇴, 중공군 5차공세 등 세 번에 걸쳐 국도1호로 남하하는 적의 주력부대에 육탄으로 맞섰던 격전지였다.

봉서터널에서 올려다본 봉서산 정상

파주읍 통일공원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기념비들이 앞을 다투며 달려온다. 살신성인탑, 첩보부대 전공비, 육탄 10용사 충용탑 등등……. 등산객들은 어느덧 애국심이라는 돌덩이로 묵직해진 배낭을 추스르며 솔숲으로 접어들게 된다.

통일공원에 있는 육탄10용사탑

개마고원전사자위령탑

흙먼지를 터는 에어건이 걸린 등산로는 자잘한 통나무계단으로 이어지고, 머잖아 봉서터널 위를 지난다. 그쯤에서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 사이로 멀찌감치 봉서산 정상이 올려다보인다. 그냥 정상이 아니다. 통유리로 감싼 원형전망대 두 개가 마주 서 있다. 왠지 거기까지는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밀려든다.


심심찮게 옷차림이 가벼운 마을 사람들이 정담을 나누며 스쳐 간다. 산책로란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오솔길을 줄여가다 보면 10여 호쯤 되는 산간마을로 들어선다. 등산로와 마을안길 구분이 쉽지 않다. 끝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축대 아랫길을 택하는 게 요령이다.

헷갈리기 쉬운 마을길

파주초등학교로 가는 옛길 표지

봉우리 하나를 넘어선 다음에는 봉서리에서 향양리로 넘어가는 간선도로를 건너야 한다. 인생이 오르막만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가, 숨 크게 몰아쉬고 능선으로 올라붙는다. 길이 넓어지면서 등산로 양쪽 나뭇가지에 걸린 ‘의주길 리본’이 나타난다. 잘록한 산허리에서는 파주초교 0.8km 옛길 표지판이 길목을 지키고, 의주길 표지가 선명한 이정표가 팔 벌리고 뒤를 받친다.

가파른 이 계단을 다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

정상 표지석과 정자

굽잇길을 휘돌면 기다란 나무계단이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다. 갑자기 웬 평지풍파냐, 지레 불평부터 하면 안 된다. 정상이 가깝다는 신호인 것이다. 오른쪽으로 죽 늘어선 운동시설 아래 약수터가 있다. 견칫돌로 쌓은 견고한 축대가 무색하게 똑똑똑, 점을 찍는 물방울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철봉운동을 하던 마을 사람이 손을 내젓는다. “마시면 안 됩니다.”


왼쪽으로 정자 뒤편에 물러앉은 봉서산 정상비가 보인다. 213m. 고개를 완전히 젖혀도 정상이 안 보이는, 그곳이 정상일 리 없다. 위성지도에 나타난 정상은 214.5m. 파주 산마루를 지키는 정상표지석 대부분이 그렇듯 갈팡질팡한다. 산신령께서도 비석의 숫자까지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듯 무심하시다.

도로변의 대피호

정상 진입이 막힌 철문

길이 매끈한 시멘트 도로로 바뀐다. 두껍게 쌓인 낙엽이 몹시 미끄러운데, 절벽을 파고든 대피호가 신기하다. 보통의 참호가 사람이 드나들 정도라면, 봉서산 대피호는 트럭도 너끈히 드나든다. 산 아래서 치고 올라온 아스팔트 도로가 산허리를 휘감아 올라가는 갈림길에 전망대가 서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 시야가 트였으니 명학산 비학산 감악산이 첩첩하련만, 안개 속으로 뿌옇게 흩어지고 만다.


경사로를 따라가다 보니 검은 철문이 턱, 막아선다. 『파주시지』 1권 「파주 이야기」에 적힌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가 먹었다는 ‘장사우물’이고 다른 하나는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전대우물’이다. 또한 산마루에는 장사가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바위가 남아 있다”는 구절을 확인할 길이 뚝, 끊기고 만다. 장사우물과 전대우물도 궁금하지만, 공기바위는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봉서산 정상을 개방해도 좋지 않을까. 어딘가에서 읽은, 요새에 관한 글이 떠오른다.

“14세기에 대포가 등장하자 중세시대의 요새는 쓸모가 없어졌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대포의 화력을 흡수하기 위한 참호와 흙벽이 추가되었다. 19세기에 폭발탄이 등장하자 또 다른 진화가 이루어졌다. 요새의 대부분은 지하에 지어졌으며, 방책들과 사격 위치들이 통로로 연결되었다. 철근 콘크리트 요새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무기는 대규모 요새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오늘날 과거의 요새들은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남서쪽이 트인 전망대 풍경

발걸음 되돌리는 아쉬움을 배려한 듯, 곁길 아래 전망대가 서 있다. 남쪽과 서쪽으로 시야가 트였으나, 안개가 자욱하다. 어깨띠 두른 금병산이 다가서는 듯싶더니, 고령산 앵무봉과 북한산이 하늘가에 엷은 금을 그으며 스러진다.


아스팔트 도로를 되짚어 대성사 쪽으로 미끄러진다. 파주리에서 봉서리로 넘어가는 간선도로변, 금강력사와 포대화상이 지키는 절 이름은 용불사다. 오래 묵은 등산지도에 적힌 대성사는 용불사의 옛 이름이란다.


콜택시를 불러놓고 “통일동산 가 주세요.”라고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언뜻, 차창에 전공탑이 스친다.

“저기, 탑 있는 데가 맞는데요.”

택시 기사가 되묻는다. “통일동산 간다고 안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통일공원을 통일동산이라고 했네요.”

군말 없이 유턴한 택시는, 고맙단 말이 목울대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주차장에 닿는다.


산을 말하려면 한두 번 등산으로는 안 된다. 어떤 산이든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이게 마련이고, 등산로도 여러 갈래인 법이다.

평일 한낮을 골라 파주초등학교 앞으로 올라간다. 좁은 길을 굽이굽이 에돌아 주내교회 앞마당에 차를 세운다. 300m 위쪽에 파주향교가 있지만, 차를 거기로 가져가면 등산로 입구까지 오가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돌아서며 올려다본 주내교회 현판이 정겹다. 파주읍의 옛 이름이 주내읍 아니던가.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파주 향교

대성전 옆 보호수(향나무)

코로나19로 파주향교 문은 잠겨있다. 파주읍은 파주목 관아가 있던 곳이고, 파주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세운 국립학교다. 그곳에는 세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문에서 가까운 370년 된 느티나무(경기-파주-40), 대성전 오른쪽의 느티나무(경기-파주-38), 대성전 왼쪽의 270년 된 향나무(경기-파주-41)다.


12시 반, 잰걸음 내딛는 사람들이 한둘 아니다. 마주 오는 젊은이에게 묻는다.

“매일 등산을 하십니까.”

“예. 점심시간마다 한 시간씩, 전망대 두 곳을 찍고 옵니다.”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웬걸요. 죽지 못해 한답니다.”

오직 다이어트가 목적이란다.


교차로에서 아미재 가는 맞은편으로 질러간다. 줄줄이 늘어선 운동기구 끝머리에서 샛길이 나타난다. 약수터 물줄기는 전설 속 전대우물이라도 되는 듯, 힘차다.

저절로 갈증이 솟는데, 버텨선 안내판이 원망스럽다.

『대장균 과다, 음용 부적합.』


봉서산 부근에는 파주향교대성전(경기도문화재자료 제83호) 외에도 성혼선생묘(경기기념물 59)와 윤곤선생묘(경기기념물 106)가 있다. 1~2시간 남짓의 등산만으로 미흡하다면, 천천히 둘러보면서 운동량을 채워보는 것도 괜찮다.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