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산 한 자락이 파주시 용미리와 고양시 벽제동의 경계를 가르며 내닫다가 장령산으로 뻗어간다. 평균고도 300m, 전장 5km의 우암산이다. 중간에 끼인 야산 한 토막이 독립하여 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양끝에서 잘록하게 몸을 낮춰 고갯길을 내준 덕분일 것이다.

고령산과 잇닿은 북쪽 덕파령은 숨이 가쁘다. 고개가 하도 가팔라서 백성들이 곡식을 말로는 못 가져가고 됫박으로 날랐대서 ‘됫박고개’였단다. 조선왕 영조가 소령원 오가는 고갯길을 더 파서 낮추라고 했대서 ‘더파기고개’가 되었단다.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한 게 ‘덕파령’이란다.

우암산 등산로 지도

우암산 등산로 지도

장령산으로 이어지는 혜음령은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 공용숙박시설에 관한 기록인 「혜음원 신창기」에는 “동남방에 있는 모든 고을에서 개경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 이 길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깨가 서로 스치고, 말들은 굽이 서로 닿아서 북적거렸다.

산과 언덕은 깊고 멀며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서 호랑이가 떼로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 뿐만 아니라 간혹 불한당들이, 이 지역이 으슥하여 잠복하기 쉬우며 다니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점을 이용하여 흉행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예종 임금은 행인 보호와 편의 제공을 위해 혜음령 아래에 혜음원을 짓게 했으며, 그 후 숲속은 깨끗한 집이 되었고, 길은 평탄하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으로 향하던 사신들이 멀리 쌍미륵(용암사 마애이불입상)을 바라보며 방향을 가늠하던 고갯마루이기도 했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기병 1천이 왜군에게 전멸당한 천연의 요새이기도 했다.

혜음원지

혜음원지

쌍미륵

쌍미륵

우암산 능선길

우암산 능선길

조선의 21대 왕 영조는 참으로 파주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어머니 숙빈 최씨 원소인 소령원, 원찰인 보광사, 후궁 정빈이씨 원소인 수길원, 정빈이씨 소생 효장세자(추존왕 진종)의 능침인 영릉까지 모두 파주에 있으니 말이다.

숙빈 최씨는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보위에 오르기 6년 전인 1718년(숙종 44년)에 세상을 떠났다. 웬 심통인지, 아버지 숙종은 어머니의 장지를 내주는 데 인색했다. 연잉군이 직접 나서서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과 함께 소령원을 찾아냈고, 죽어서도 효도하겠다는 각오로 맞은편에 자신의 묫자리를 잡아뒀다. 그곳에 3년 뒤 세상을 떠난 정빈이씨를 묻었으니, 수길원이다.

연잉군은 시묘살이가 끝난 뒤에도 소령원을 자주 찾았다. 1722년(경종 3년)에는 연잉군의 지원세력인 노론 신료 170여 명이 역모로 몰려 목숨을 잃거나 귀양 가는 ‘임인삼수옥’이 벌어졌다. 숙종 때부터 더욱 심해진 당쟁의 피바람이었다.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세제의 몸이었으므로, 앞길은 더욱 캄캄했다. 연잉군은 절치부심, 사랑하는 이들이 잠들어 있는 소령원 오가는 ‘왕자의 길’에서 탕평책을 궁리해야만 했다.

2년 뒤인 1724년 가을, 소령원에 머물다가 한양으로 가던 연잉군은 고갯마루에서 파발마와 마주쳤다. 받아 든 전교는 지엄했다. 지체 없이 환궁하여 보위에 오르도록 하라. 이복형 경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전설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그곳을 수령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령령은 어디인가. 덕파령인가, 혜음령인가.

궁금증은 파주문화원에서 진행하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테마파주여행’에 참가했을 때 생겨났다.
문화원해설사 회장이던 김순자 시민기자가 ‘수령령’ 전설을 말하는 순간, 그곳이 어디냐에 꽂히고 말았던 것. ‘왕자의 길’이 오늘날의 벽제삼거리에서 보광사로 뻗은 367번 지방도로와 같은 경로라면, 혜음령을 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시절에는 혜음령만 있었다면, 덕파령을 넘을 일은 없었다. 옛 지도에는 더러 우암산 능선길이 보이기도 했다. 용미리 자연부락 세 곳 중 하나인 ‘달구니’ 마을에는 예사롭지 않은 전설이 있었다. 숙빈 최씨를 소령원으로 운구하던 중 거기에 이르러 닭이 울었으므로 ‘닭운리’로 부르다가 훗날 ‘달구니’가 되었다.
궁금증 풀이, 첫 번째 산행은 김순자 시민기자와 혜음원지에서 출발했다.

길 없는 길, 산비탈 오르기는 험난했다. 나뭇가지를 휘어잡거나 풀뿌리를 움켜쥐면서 한 시간쯤 헤맸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그럴 때 산객들은, 눈썹도 무거우니 뽑아버리고 싶다고 한다던가. 적잖이 용을 쓴 끝에 저만치 등성이 위로 하늘이 내걸렸다. 드디어 다 왔구나, 고생 끝에 행복이로구나. 환호성을 올리며 후다닥 기어올랐다. 눈앞에 잔디밭이 쫙 펼쳐졌다.
서서울CC 맨 꼭대기 코스였다. 능선을 20m쯤 앞둔 지점에서 길이 막히고 말았으니, 허망했다. 골프카트를 몰고 나타난 직원이 덜렁 실어다가 혜음령 고갯마루에 부려준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덕파령, 박달산 갈림길

비호봉

새문안 동산 옆 등산로

새문안 동산 옆 등산로

새문안 동산에서 바라본 고령산

덕파령, 박달산 갈림길

두 번째 산행은 박용탁 시민기자가 합세했다. 지난번 실수를 거울삼아 고갯마루를 살짝 넘어선 ‘고양동 유아숲 체험원’으로 들어서서 무작정 산비탈로 올라붙었다. 능선길이 바로 등산로였다. 군데군데 파 놓은 교통호에는 판자로 짠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첫 봉우리(328.6m)에 오를 때까지만 힘이 들었을 뿐, 다음부터는 순조로웠다.

비호봉에는 서 있는 비석에 새겨진 328.6m를, 누군가 828.6m로 고쳐놓았다. 아직 잎이 피기 전이었지만 울울창창한 숲은 시야를 가렸다. 멀고 가까운 마을들과 다랑논을 닮은 골프장이, 주렴 사이로 내다본 바깥풍경처럼 어른어른했다.

활공장에 이르자 앞이 트였다. 오른쪽에는 서울의 삼각산 연봉이 둘러섰고, 왼쪽에는 쌍미륵이 있는 장지산과 용미리 마을이 고즈넉했다. 한때 패러글라이딩이 박차고 날아올랐을 공터는 스산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군사도로 옆, 우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329m)는 출입금지였다. 경고판을 외면하고 철조망을 타넘었으나, 달랑 국방부 측량표지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암산에는 등산로지도는 물론이고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길이 넓어진 만큼 경관이 달라졌다. 오른쪽으로는 고령산의 넓은 품이 활짝 열렸고, 왼쪽으로는 박달산이 저만치서 다가왔다. 모퉁이를 휘감아 돈 세 갈래 길에서 덕파령으로 내려가는 군사도로로 접어들었다. 한 걸음씩 옮겨 디딜 때마다 고령산으로 파고드는 듯싶은데, 갑자기 카메라가 먹통이 되었다. 몇 굽이를 돌아나간 길은 머잖아 아스팔트길로 이어졌고, 새문안동산을 거쳐 됫박고개 쉼터에 가 닿았다.

세 번째 산행은 홀로 나섰다. 등산로 입구를 확인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카메라 배터리가 소진되어 가까이 다가든 고령산을 담아내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다행히 서서울CC 입구 오른쪽 옹벽에서 등산로의 흔적을 찾아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좁은 계단은, 이미 등산로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우암산에서 가장 높은 390m 지점

우암산에서 가장 높은 390m 지점

비호봉

비호봉

활공장에서 바라 본 용미리

활공장에서 바라 본 용미리

‘고양동 유아숲 체험원’으로 들어선 뒤, 오른쪽 등성이로 올라섰다가 능선길로 합류했다. 그곳이 제대로 된 등산로 입구였다. 비호봉을 지날 무렵, 자전거 라이딩에 나선 젊은이 대여섯이 우르르 앞질러 달려갔다. 문득 교통호마다 걸쳐 있던 판자로 짠 다리가 떠올랐다. 덕파령에서 혜음령까지 이어진 우암산 능선길이 자전거 라이딩에 더 적합해보이면서 ‘왕자의 길’이 덕파령이냐, 혜음령이냐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어 보였다.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