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사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鰲頭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847년(신라 문성왕 9) 혜소(慧昭)가 창건하였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사찰이 있는 오두산이 검은 편이라 검단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당시에는 임진면 운천리에 있었으나, 1731년(정조 7) 장릉(長陵)을 탄현면 갈현리로 옮길 때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이후 장릉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해서 한때는 두구사(豆拘寺)라고도 불렀다.”

검단사

[네이버백과]의 검단사에 대한 설명이다. 당장 세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1. 검단사는 오두산에 있었나?
2. 오두산(烏頭山)이 아니라 오두산(鰲頭山)이 맞는가?
3. 검단사가 창건 당시에는 임진면 운천리에 있었는가?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기록과 전설이 제각각이니, 검단사를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검단산과 약산을 한 바퀴 감아 도는 ‘파주 살래길’을 걷거나, 검단산에서 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건너지르곤 하였다.

검단산

건강에 좋으리라는 것 말고도 이런저런 가외의 소득은 있었다. 첫 번째는 오두산을 마주보며 궁리에 빠지는 재미였고, 두 번째는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 즐거움이었으며, 세 번째는 검단사 법화전의 아기자기한 관음보살을 뵙는 기쁨이었다.

살래길 입구

일단 자유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송촌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필승로로 접어든다. 신세계아울렛 앞까지 갔다가 유턴하여 직진하다가 모퉁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검단사입구로 들어선다. 첫 번째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나서면 ‘파주 살래길’ 안내판이 계단 위에서 고개를 까딱거린다. 거기가 4.2km, 1시간 반의 숲속 천국 입구이다.

오두산전망대

10분쯤 걸으면 ‘장준하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잠시 시간을 할애할 값어치는 충분하다. 조금 더 가다보면 위풍당당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펼치고 내려다본다. 고려의 왕과 충신들의 위패를 봉안했다는데, 미공개 지역이다. 그러려니 하고 왼쪽을 내려다보면 된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각급 국가대표팀의 선수 훈련을 위해 설립된 ‘축구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가 있다.

일곱 살이던 6.25때 피란 나와서 서른두 살까지 약산골(법흥1리)에서 살았다는 윤도균(80세)수필가에 따르면, 그곳이야말로 상전이 벽해가 돼버린 작골[芍谷]이란다. 나무지게를 지고 하루에 두 번씩 열쇠고개를 넘어 다니며 수없이 곤두박질을 쳤던 골짜기였단다. 그곳에 교하노씨 ‘노순지’가 큰 굴을 파고 자손들에게 학문을 익히도록 했는데, 오두산 정기를 받아 3대 정승인 노한(盧閈, 1376~1443, 우의정), 노사신(盧恩愼, 1427~1498, 영의정), 노공필(盧公弼, 1445~1516, 영중추부사)이 났다는 전설도 있단다.

장단콩 웰빙마루

옆으로 ‘파주장단콩웰빙마루’가 이어진다. 파주장단콩웰빙마루는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 2021년에 개장했다. 그곳에도 사연이 있다. 처음에는 검단산에서 약산으로 이어진 산줄기 중 필승로로 잘려나간 낮은 산마루를 깎아내어 조성하기 시작했으나, 북쪽 벼랑이 ‘수리부엉이 서식지’였으므로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닥쳐 쫓겨났다.

심학산에서 바라본 교하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나무 계단이 있다.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쯤에서 의문점을 풀어봐야 한다. 처음에는 자유로를 뚫기 위해 오두산을 뭉텅 잘라냈다. 다음에는 성동리, 법흥리 약 300만㎡ 일대에 오두산통일전망대, 헤이리마을, 카트랜드, 프리미엄아울렛 등 여러 관광콘텐츠를 갖춘 ‘통일동산관광특구’를 조성하기 위해 산줄기를 헐고 골짜기를 메웠다.

송악산

오두산에는 오두산성이 있었다. 그 명칭은 기록에 따라 오도성(烏島城) -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 - 오도산성(烏島山城) - 오두산성(鰲頭山城)으로 변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도성이라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도성산성이라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현의 서쪽에 있으며 둘레는 2071척으로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가 여기에서 합친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광개토왕비’의 각미성(閣彌城)과 『삼국사기』의 관미성(關彌城)이 오두산성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열쇠고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오도성산(烏島城山)은 현 서쪽 7리에 있다.”면서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 북쪽을 오도성산, 남쪽을 한록산(漢麓山)이라고 했다.
『교하읍지』에는 “오두산은 검단산 서쪽 산록인데 일명 구도산(鳩島山)이며 임진강과 한강이 이 산 앞에서 합친다.”고 하였다.

한강상류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신라 문성왕 9년(847년) 정묘년에 검단선사가 시자에게 명하여 개산(開山)하고 그 별호로 절 이름을 삼았다. 신해년(1731)에 조정에서 인조 및 인열왕후릉을 파주 임진면 운천리에서 갈현리 옮길 때 검단사도 이 자리로 옮겼다고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검단사는 거기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갈현리에 교하향교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장릉이 옮겨 오면서 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돌탑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검단산봉수가 “서쪽으로는 풍덕군 덕적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고양군 고봉성산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주에서 해안을 따라 이곳에 이르고 고봉성산과 무악서봉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으로 연결되던 제4봉수였다. 『대동여지도』와 『증보문헌비고』에는 검단산봉수의 이름이 형제봉봉수(兄弟峰烽燧)로 바뀌어 있다. 서쪽(검단산)과 동북쪽(약산)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니 훗날 형제봉으로 불렀던 것 같다.

검단조서진영

이쯤 되면 오두산과 검단산은 각기 독립된 산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잠시 생각의 갈피를 접고 먼산바라기를 한다.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 또렷하게 보인다. 통일전망대가 자리 잡은 봉우리 한록산, 그 북쪽 봉우리 오두산, 자유로를 건넌 다음 헤이리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늘어선 세 개의 봉우리가 주르르 다가선다. 혹시, 누군가가 예전에 저 다섯 봉우리를 일러 오두산(五頭山)이라 불렀던 건 아닐까. 이쯤 되면 모든 의문들이 스르르 주저앉는다.

불회도 목조관음

울창한 잣나무 숲길을 지나 동북쪽 전망대에 오르면 멀쩡한 산봉우리를 까뭉개 놓은 ‘수리부엉이동산’과 유승앙브와즈아파트가 보인다. 서북쪽 멀리 가물가물한 임진강 건너 북녘이 왠지 애잔하다. 그곳에서 약초가 많다는 약산골로 이어진 둘레길을 두고 능선길로 올라선다.

땀이 솟을 만하니 해발 155m, 약산 정상이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풍광은 전망대와 다를 게 없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열쇠고개로 미끄러진다. 잘록한 산허리에 철봉대와 운동기구가 놓여 있다. 핸드폰의 고도계를 켜니 해발 120m다. 비스듬히 숨소리를 높여가노라니 검단산 정상, 해발 157m다. 겨우 2m 높을 뿐이니 그곳 전망도 기대할 게 없다.

갑자기 삼층탑과 돌무더기가 나타나더니 한강전망대에 다다른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비단을 풀어놓은 듯싶은 한강 물줄기가 심학산에 가 닿고, 모내기를 끝낸 교하벌판이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풍성하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으로는 임진강을 얼싸안고 강화만으로 흘러가는 한강이 한세상을 끌고 날아오를 듯 눈부시다.

일출과 일몰의 비경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란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재촉해 검단사로 내려선다.

무량수전

아미타불회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95호), 검단조사진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목조관음보살좌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4호)이 보존돼 있는 법화전을 내려다보며 무량수전으로 다가서다가, 다른 절간과 달리 한글로 된 주련을 읽으면서 미소를 머금는다.

"어렵구나 하늘의 별 따기요, 쉽구나 세수하다 코 잡기라, 어찌하여 이런 차별 생겼노, 먹구름 한 줌 오가는 탓일네.”

취재: 파주알리미 강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