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묘역

노태우 묘역

노태우와 국가보존묘지

지난 5월 4일, 노태우 전(前) 대통령[이하 편의상 노태우로 약칭]의 묘역이 보건복지부에 의해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다. 2009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국가보존묘지 1호로 지정된 뒤를 이은 국가보존묘지 2호다.
2021년 10월 26일, 전두환보다 28일 먼저 세상을 떠난 노태우는 유언장을 통해서 죽어서도 남북통일이 이뤄지기를 염원하고 싶다면서 북녘 땅이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소망했다. 장례는 국무회의 심의를 통해 국가장으로 치뤄졌다. 유족 측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는데, 장지 확정 문제로 다소 시간이 지체되어 파주의 검단사에 임시 안치 후 2021년 12월 9일 현재의 묘역에 안장했다.

노태우 국가장 예우

노태우 국가장 예우

노태우 국가장 안장식 참석자들

노태우 국가장 안장식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34조에 의해 국가장, 사회장 등을 하여 국민의 추모 대상이 되는 사람의 묘지 또는 분묘 등이 국가보존묘지  대상이 된다.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된 묘지와 분묘는 묘역 면적, 상석ㆍ비석 등 시설물의 종류나 크기, 분묘의 설치 기간 등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보건복지부는 노태우 장례가 국가장으로 진행된 사실을 바탕으로 파주시·경기도 등 지자체, 법무부 등 관계부처 의견과 관계 전문가 자문,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국가보존묘지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파주와 노태우

동화경모공원은 북한을 고향으로 둔 이들을 위해 설정된 특별한 공원 묘원이다. 이곳에는 이북 실향민과 그 후손 외에도 현재는 파주시민을 위한 구역도 배정돼 있다. 노태우의 묘는 동화경모공원 내 L-6 구역의 최상단에 홀로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약 8.4㎡(약 2.5평)쯤이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으로는 매우 작은 편이지만 화장한 뒤 매장하되 묘지를 크게 하지 말라는 고인의 유지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해당 묘지 구역에 배정되어 있는 크기가 그 정도인 것도 함께 작용했다.

노태우 묘역 표지판

노태우 묘역 표지판

북한 땅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실은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가 비서실에 지시하여 통일부와 협력하여 추진하도록 한 것이 그 시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태우는 임진각 개설 이후 개발이나 활용이 부진하던 통일동산, 평화누리공원 등의 활성화도 챙겼다. 2000년대를 전후하여 속속 가시적 성과를 내게 된 것도 그 뿌리는 노태우의 그러한 남북 통일 관련 행보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총체적인 노력이 노태우의 대표적 치적으로 불리는 북방정책이었다.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도 최초로 수교했다.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는데 훗날 차관 회수 과정에서 현금이 모자란 러시아가 현물(헬리콥터)로 갚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적성 국가였던 러시아산 군용 헬기가 들어오는 일도 벌어졌다. 1992년에 이뤄진 중국과의 역사적인 수교도 노태우 정부가 3년이나 공을 들인 결과였다.
파주에는 남북통일을 포괄하는 노태우의 북방정책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1992년 그 씨앗의 하나로 이북 실향민들에게 추모의 장을 조성하여 생전에 풀지 못한 망향의 한을 위로하고 통일 염원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일을 적극 후원했던 노태우가 이제는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다

기자가 묘지를 찾은 날, 먼저 온 이 하나가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었다. 다가가 이야기를 해보니 서울에서 온 586 출신이었다. 이른바 1980년의 서울역 회군에도 참여한 5월 항쟁파였는데 <노태우 회고록>(2011)을 대하고 나서 그에 대한 공과(功過) 구분을 확실하게 되었다면서, 노태우의 잘못도 크지만 공 또한 작지 않음을 깨닫고 그동안 고집해 온 자신의 속 좁은 시선을 사과할 겸 찾았다고 했다.

그 뒤 또 다른 가족 팀을 만났다. 노부부와 그 아들이었는데, 참배는 노부부만 했다. 혹시 참배하게 된 사연이 있느냐 물었더니 할머니로부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전두환 시절에 남편이 술자리에서 전두환 욕을 좀 했다가 어디론지 끌려가서 며칠을 고생하다 온 뒤로는 입을 닫고 지내던 시절이 계속 됐는데, 노태우 시절에 와서는 희색이 돌아왔단다. 그 이유가 뜻밖이었다. ‘노태우가 자신을 소재로 삼아서 개그를 해도 좋다’고 한 다음부터였다. 자신을 개그 소재로 기꺼이 내놓은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기자도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확인해보고서야 알았다.

참배객 모습

참배객1

참배객 모습

참배객2

앞서 만났던 586 출신으로부터 간단히 전해 들은 노태우의 치적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으로 돌아와 관련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 유엔 가입의 성과 : “우리가 유엔 가입을 신청한 지 42년 8개월, 오랜 기다림 끝에 회원국이 됩니다. 이제 남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어두운 타율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1991년 시애틀 교민 오찬 연설에서]

- 노태우는 1989년 10월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한 두 번째의 대통령(맨 처음은 1954년 이승만)일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중위 시절 미국 공수단 장기 교육도 받았고, 육사에서 잠시 영어 교관을 하기도 했다.

-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을 잘 들었다. 노태우 정부를 회의 정부라 할 정도로 자주 회의를 열었다. 그때 노태우가 한 말, “나는 가장 크게(泰) 어리석은(愚) 사람, 곧 큰 바보이니 여러분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내 주세요.”

- 놀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물태우/물대통령/물통’이란 별명을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사람: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지요. 내게 ‘물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프랑스 교민 리셉션 중 별명  ‘물태우’ 얘기가 나오자]

- 노태우의 장손, 곧 노재헌의 아들인 노장호는 2번에 걸쳐 현역병을 자원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서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됐지만, 노장호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어학원에서 한국어 교육 과정을 수강 후 자원 재입대하여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였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아들 노재헌이 중환자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 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 영령을 추모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관련자 중 하나가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그것이 최초이자 유일했다. 사후 공개된 유서에서도 사과의 뜻을 다시 한 번 밝혔다.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였을 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씨가 직접 조문을 왔는데, 그 또한 최초의 사례였다.

- 이제는 흔해진 낱말 ‘국민과의 대화’: 그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계속 시도한 대통령이 노태우였다. 당시 YS와도 매주 정기 회동을 했다. 

노태우는 박정희와 기일이 같다. 42년 차이를 두고 한날에 갔다.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른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가장 1호인 김영삼의 뒤를 이어 국가장 2호로 치러진 노태우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는 언제쯤 정립될 수 있을까.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