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만났던 586 출신으로부터 간단히 전해 들은 노태우의 치적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으로 돌아와 관련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 유엔 가입의 성과 : “우리가 유엔 가입을 신청한 지 42년 8개월, 오랜 기다림 끝에 회원국이 됩니다. 이제 남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어두운 타율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1991년 시애틀 교민 오찬 연설에서]
- 노태우는 1989년 10월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한 두 번째의 대통령(맨 처음은 1954년 이승만)일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중위 시절 미국 공수단 장기 교육도 받았고, 육사에서 잠시 영어 교관을 하기도 했다.
-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을 잘 들었다. 노태우 정부를 회의 정부라 할 정도로 자주 회의를 열었다. 그때 노태우가 한 말, “나는 가장 크게(泰) 어리석은(愚) 사람, 곧 큰 바보이니 여러분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내 주세요.”
- 놀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물태우/물대통령/물통’이란 별명을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사람: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지요. 내게 ‘물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프랑스 교민 리셉션 중 별명 ‘물태우’ 얘기가 나오자]
- 노태우의 장손, 곧 노재헌의 아들인 노장호는 2번에 걸쳐 현역병을 자원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서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됐지만, 노장호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어학원에서 한국어 교육 과정을 수강 후 자원 재입대하여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였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아들 노재헌이 중환자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 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 영령을 추모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관련자 중 하나가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그것이 최초이자 유일했다. 사후 공개된 유서에서도 사과의 뜻을 다시 한 번 밝혔다.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였을 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씨가 직접 조문을 왔는데, 그 또한 최초의 사례였다.
- 이제는 흔해진 낱말 ‘국민과의 대화’: 그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계속 시도한 대통령이 노태우였다. 당시 YS와도 매주 정기 회동을 했다.
노태우는 박정희와 기일이 같다. 42년 차이를 두고 한날에 갔다.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른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가장 1호인 김영삼의 뒤를 이어 국가장 2호로 치러진 노태우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는 언제쯤 정립될 수 있을까.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