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호수 전망대 앞 출렁다리에 올라서는 순간, 건너편에서 벌떡 일어서는 앞산과 마주하게 된다.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의 왕자 시절, 연잉군(延礽君)의 효심이 깃든 팔일봉(八日峰, 462.5m)이다.

앵무봉에서 건너다본 팔일봉

앵무봉에서 건너다본 팔일봉

첫 번째 산행은 감사교육원에서 출발, 정상을 찍고 오랑주리 카페 옆으로 내려오는 길을 골랐다. 운 좋게 ‘6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둑길을 걸어 파란 철문을 통과한 뒤, 50m 아래에 있는 임도 입구로 들어섰다. 머잖아 Y자 길목이 나타났다. 정상으로 가려면 그곳에서 ‘산림기상관측탑’ 뒤 능선으로 올라서야 했다. 예고 없이 나타난 비탈길이 힘에 부쳤으나, 일단 280m봉에 올라선 다음에는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이어졌다.

1시간쯤 뒤 제2봉(409m)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10분쯤 아래로 내려갔다가, 산악오토바이가 파헤친 된비탈을 20분쯤 다시 치달아 올랐다. ‘팔일봉 정상’이라는 표지판과 의자 하나뿐이었고, 울창한 숲에 가려 조망은 없었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는 이정표가 있었다. 낙엽 쌓인 급경사를 좍좍 미끄러져 40분 만에 오랑주리 카페 앞 마장호수에 도착했다. 별로 좋아할 일이 못 되었다. 주차장까지는 호수를 반 바퀴나 우회해야 할 판이었다.

마장호수 출렁다리 정면에 보이는 팔일봉

마장호수 출렁다리 정면에 보이는 팔일봉

팔일봉은 여덟 개의 봉우리로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는 뜻이라 한다. 마장호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앵무봉에 올라가 본 사람들은, 정상과 제2봉이 품어 안은 골짜기 모양이 거룻배와 같으니 거루봉(거룻봉)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정작은,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

연잉군(영조)이 보위에 오르기 6년 전인 1718년(숙종 44년)에 어머니 숙빈최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웬일인지 아버지 숙종은 장지를 내주는 데 인색했다. 연잉군이 직접 나서야만 했는데, 양주 땅에서 찾아낸 명당자리에는 이미 조선조 초에 영의정을 지낸 윤자운의 묘가 있었다. 몹시 실망한 연잉군이 뒤편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8일 동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팔일봉이라는 이름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팔일봉 동쪽에 있는 육지상사

팔일봉 동쪽에 있는 육지장사

윤자운 묘. 팔일봉을 뒤에 두고 불곡산을 바라보는 동향이다.

윤자운 묘. 팔일봉을 뒤에 두고 불곡산을 바라보는 동향이다.

두 번째 산행은 팔일봉 동쪽 기슭의 육지장사에서 출발했다. 육지장사는 1997년에 세워졌는데 일광지장(천상계), 제계지장(인간계), 지지지장(아수라계), 보인지장(축생계), 보수지장(아귀계), 단타지장(지옥계) 등 지장보살의 여섯 가지 현신인 육지장을 봉안한 사찰이란다. 설명은 간단명료했지만 제대로 새기자니, 공부가 한참 모자랐다.

그곳이 정상에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라지만, 똑같은 높이에 거리만 가깝다는 건 반갑지 않았다. 급격하게 고도를 높이자면 그만큼 비탈이 가파를 수밖에 없는 법. 1시간 만에 정상에 닿았으나, 기진맥진 초죽음이 되고 말았다.

음력 3월 9일, 꼭 요맘때 타계한 어머니 숙빈최씨의 주검을 놔두고 골짜기와 능선을 주름잡았을 연잉군의 발자취를 떠올렸다. 정상표지판 뒤로 늘어선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바라보던 연잉군의 심사가 참담하지 않았겠느냐, 다독이면서 숨을 골랐다. 거기서부터 제2봉까지 20분, 다시 쇠장봉까지 20분, 체재고개(쇠장이고개)까지 또 20분이 걸렸다.

예전에 소장수들이 넘나들었다는 쇠장이길이,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힘차게 내달리는 팔일봉 여덟 봉우리를 넷씩 갈라놓고 있었다. 차는 육지장사에 세워두었는데, 둘러보니 산봉우리가 첩첩이었다.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 소령원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 소령원

영조의 첫 아들의 어머니 정빈이씨의 묘, 수길원

영조의 첫 아들의 어머니 정빈이씨의 묘, 수길원

세 번째 산행은 소령원 뒤편에서 시작했다. 오후에 나선 탓에 허둥거리다가 숲길로 들어선 지 5분 만에, Y자 삼거리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송추CC쪽 방향만 가늠하고 오른쪽 길을 택한 게 탈이었다. 숲을 가르고 뻗어간 오솔길은 숨 가쁘게 등성이를 타고 넘더니 기산2리, 노스팜CC 입구로 내리박혔다. 구불구불 기어오르는 쇠장이길이 아득했다. 오죽하면 ‘경사가 심하니 10톤 이상의 차량은 반드시 회차하라’는 안내판이 서 있겠는가. 올라오는 데 쓴 1시간에, 30분을 더 보탤 수밖에 없었다.

고갯마루에 올라선 김에, 지난번 쇠장봉에서 내려왔던 길도 살펴보았다. 그날은 지나쳤으나, 입구에 ‘오토바이 출입 금지’ 안내판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소령원에서 제대로 길을 잡았더라면 올라왔을 등산로도 찾아봤다. 340m봉을 향해 뻗어간 군사도로 입구의 초록색 펜스, 등산로는 그곳뿐이었다.
택시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오후 4시였다. 주먹을 말아 쥐고 빠른 걸음으로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봉우리 4개를 넘었다. 1시간 30분 만에 소령원에 도착했다.

소령원과 수길원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보여주는 위성사진(출처: 네이버)

소령원과 수길원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위성사진(출처: 네이버)

그때 연잉군은 서쪽으로 늘어선 팔일봉의 마지막 봉우리 남쪽 기슭에서 두 자리를 찾아냈다. 어머니 숙빈최씨의 몫으로 소령원 자리를, 어머니 곁에서 효도를 이어갈 자신의 몫으로 수길원 자리를. 그러나 자신의 몫으로 점찍었던 자리는 3년 뒤에 아들(효장세자)을 남기고 죽은 정빈이씨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부디 자신을 대신하여 시어머니 숙빈최씨에게 효도를 하라는 속다짐과 함께.

이제는, 연잉군이 8일 동안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일과 그때 찾아낸 두 자리를 되짚어 볼 때가 되었다. 처음엔 소령묘였으나 연잉군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승격된 어머니 숙빈최씨의 소령원. 처음엔 석물조차 갖추지 못한 소훈(종5품)묘였으나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소원(정4품), 죽은 아들이 이산(정조, 사도세자의 아들)의 양부가 되고 왕(진종)으로 추증되자 정빈(정1품)으로 승격된 정빈이씨의 수길원.

후세에 누가 있어, 팔일봉 여덟 봉우리를 헤매고 다닌 연잉군의 ‘명당 찾기’ 발품이 헛되다 하겠는가.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