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적성면에는 걸어서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 두 곳이 있다. 장좌리의 고랑포와 주월리의 가여울이다. 국사봉(150m)은 고랑포와 가여울 사이에 걸쳐 있는 야산으로, 맞은편의 호로고루성과 함께 남북왕래의 통로를 지키는 교두보였다.
『조선 하천 조사서』(조선총독부, 1929)에는 “임진강 하구에서 고랑포까지는 400석 분량의 곡식을 실은 선박의 운항이 가능했고, 도감포를 지나 전곡까지는 적어도 60석을 실은 소규모 선박이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해안부터 전곡까지의 임진강은 배를 타지 않고서는 사람이나 우마차가 건너다니기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차량이나 탱크의 도하는 더욱 어려웠으므로, 고랑포와 가여울 2곳은 오랜 세월을 두고 전략의 요충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 편에는 “국사봉(國事峰)은 파주 적성면 자장리와 식현리에 걸쳐 있는 해발 150m의 산으로 『여지도서』와 『파주읍지』에는 국사봉(國祠峰), 『장단읍지』에는 국사봉(國師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과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나라를 지켰던 봉우리라 하여 국수봉(國守峰)이라고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또한 파주시 도로명주소 제정 기록에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사봉이 있어 ‘국사로’로 부여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국사봉 지도

국사봉 지도

37번 국도 자장리 사거리에서 식현리로 가는 국사로를 10분쯤 달려가면,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비상도로가 나타난다. 그곳에 차를 세워놓고 슬슬 등산을 시작하면 된다. 솔숲을 헤치면서 뻗어간 비상도로를 20분쯤 걸으면, 가볍게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비상도로는 군부대 앞 철조망 안쪽으로 휘어지고, 군사훈련장이 있는 국사봉 정상으로는 팍팍한 황톳길이 펼쳐진다. 정면으로는 두지리 가는 지름길이 잡목 숲으로 꼬리를 사린다.
군부대 앞 철조망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반대쪽으로 부드럽게 고도를 높이는 황톳길을 10분쯤 올라간다. 파주의 산이라면 어느 곳이나 참호와 교통호가 널려 있지만, 국사봉의 그것은 유별나다. 자로 잰 듯 정교하고, 꿈틀거리기라도 할 듯 생생하며, 방금 청소검사를 마친 듯 정갈하다. 정상을 딛고 서면 앞이 탁 트인다. 경순왕릉, 고랑포구역사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임진강의 모래톱, 강 건너 호로고루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여 년 전 고구려 군사들이 호로고루성에서 고랑포구를 지켰다면, 신라 군사들은 국사봉 초소에서 고랑포구를 지켰다.

국사봉 가는 길

국사봉 가는 길

국사봉에서 내려다 본 고랑포 전경

국사봉에서 내려다 본 고랑포 전경

숲 밖으로 나서야 숲이 보인다던가, 국사봉을 제대로 보려면 강을 건너야 한다. 세거리 외딴집 앞에서 식현리 사거리까지 갔다가 두지리로 좌회전하면, 강변에 임진강 황포돛배 선착장이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는 황포돛배에 오른다. 두지리에서 고랑포까지 40분에 왕복하는 뱃길이다.
안내원 겸 사공이 뱃길의 유래를 열심히 해설하건만, 강물에 발을 담그고 일렁이는 국사봉의 발바닥 같은 임진적벽이 보일 뿐이다. 사공 머리 위에 걸린 ‘추억 속의 고랑포’ 사진에는 화신백화점까지 있었던 전성기의 모습이 담겼건만, 정작 황포돛배 안에서는 국사봉도 호로고루성도 바라볼 수 없다. 강의 양쪽이 모두 절벽인 탓이다.

임진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배

임진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배

황포돛배에서 바라본 임진적벽

황포돛배에서 바라본 임진적벽

오랜 세월 현무암 지대를 깎아가며 흐르는 임진강과 한탄강은 양쪽에 10m가 넘는 수직 절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때문에 임진강과 한탄강은 200여 년 동안에 걸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라 불렀다고 적혀 있으며, 실제로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졌던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를 심심치 않게 기록해 놓았다.

호로고루성에서 바라본 국사봉

호로고루성에서 바라본 국사봉

장남교를 건너 호로고루성에 오른다. 감악산과 중성산, 국사봉과 파평산이 주르르 늘어선다. 그러고 보면, 국사봉은 파주에서 가장 높은 감악산(675m)과 파평산(496m)의 중간에 끼어서 남북왕래의 통로를 동서로 확연하게 갈라놓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중공군은 단기간에 서울을 재점령하고자 3개 사단을 투입했다. 4월 22일 고랑포를 건너온 중공군의 우익은 국사봉 서쪽으로 진격, 문산 쪽으로 몰려가서 4월 25일까지 국군 1사단과 봉서산전투를 벌였다. 한편 같은 날 가여울을 건너온 중공군의 좌익은 국사봉 동쪽으로 진격, 감악산으로 몰려가서 영국군과 3일간 설마리전투를 벌였다. 그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워낙 극렬했으므로, 영국군 글로스터대대는 고립무원의 결사 항전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고랑포에는 많은 애환이 서려 있다. 경순왕릉의 사연도 그중 하나다.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바쳤던 비련의 신라 마지막 왕, 김부는 도라산에 암자를 짓고 신라 쪽을 바라보며 살다가 죽었다. 뱃길로 경주까지 운구하기 위해 장례행렬이 고랑포에 도착했을 때, 개경 1백 리 안에 묘를 조성하라는 고려왕의 명이 떨어졌다. 주검은 고랑포 언덕에 묻혀서 남쪽 고향 바라기를 하게 되었다.

북한군 묘지

북한군 묘지

북한군 침투지점(적성면 장좌리)

북한군 침투지점(적성면 장좌리)

또 하나는 1968년 1월, 고랑포를 건넜던 북한 124군 부대의 운명이다. 개성에서 출발한 김신조 등 31명의 침투조는 고랑포를 건넌 다음, 장좌리와 답곡리의 국사봉 서쪽 기슭을 지나 파평산, 비학산, 노고산, 팔일봉, 고령산, 북한산 비봉을 거쳐 청와대 후문으로 달려갔다. 당초의 침투목적은 실패했고, 총격전 끝에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들의 유해는 고랑포 도하지점으로 되돌아와 답곡리 북한군 묘지에 묻혀서 북쪽 고향 바라기를 하게 되었다.

그들의 도하지점에는 ‘침투지점 비’가 서 있고, 장좌리의 임진강 변에는 ‘민통선 경계 철문’이 스산하게 늘어서 있다. 홀로 살아남은 김신조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세웠던 처음의 침투계획은 얼어붙은 임진나루 도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얼음판을 뒤집어놓은 탓에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 남과 북에서 국사봉과 호로고루성이 지켜보는 고랑포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봄빛이 완연하다. 가족과 함께 나서는 봄나들이로 국사봉 주변을 돌아보는 게 어떨까 싶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