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실제로 의과대학의 해부 실습 재료가 된 의학박사이자 한글학회 이사장(1959~1977). 1999년 특허청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세종대왕,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지석영, 우장춘과 함께)’ 중 하나로 선정한 인물... 그가 최초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설하여 평생토록 의사/한글학자/발명가라는 1인3역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해낸 공병우 박사다.
공 박사를 이 위대한 발명가 7인에 들게 한 것은 한글타자기인데, 이 한글타자기가 6.25정전 협정문 작성에서도 암암리에 크게 한몫을 해냈다. 당시 미군은 전쟁 통에 더욱 비참하게 피폐해진 한국민을 대하고는 가난하고 미개한 동양 민족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협정문 작성 과정에서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고, 그걸 타자할 수 있는 타자기까지 있다는 걸 알고는 크게 놀랐다’고 미군 전사[6.25정전회담 약사]에 남길 정도의 성가를 그 타자기 하나가 해냈다.
공 박사의 한글타자기 개발사는 길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 처리에서의 한글 타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여겨 그 개발에 매달린 끝에 첫 시제품 3대가 미국의 언더우드 사에서 만들어진 건 1950년. 그 뒤 극소량이 들어와 쓰이다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 1953년이었다[그중 두 대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552-1과 552-2로 지정돼 있다]. 회담 당시 미군 측의 통역을 맡고 있던 언더우드 씨가 공 박사에게 한글타자기를 요청하여 제공한 게 바로 그 협정문 작성에 쓰였다.
공 박사는 이후로도 한글타자기 제작 및 보급을 계속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타자기를 생산할 만한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 미국의 영문타자기를 들여다 자판과 글쇠를 한글로 바꾸고 글쇠판 조작 방식 일부를 바꾸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을 100% 국산화에 성공한 게 1970년이다. 그 첫 상표가 유니온이었다. 말하자면 세벌식 한글타자기의 첫 순수 국산품으로, 정전협정문에 쓰인 공병우 타자기의 적장자인 셈이다. 그 유니온 시제품 타자기가 파주에 있다. 두루뫼박물관(법원읍 초리골길 278. 031 958-6101/2)에서 소장 중이다. 보급형은 한글박물관에서 소장 중인데, 이처럼 타자기 하나를 소중히 하는 것은 공 박사의 혼이 담겨 있는 제품이라서가 아닐까.